배트맨 PC엔진판
배트맨 (Batman Japan) · 1990 · Sun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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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인데 미로를 헤맵니다
1989년 영화 배트맨이 크게 흥행한 뒤, 여러 기기에 배트맨 게임이 쏟아졌습니다. 대부분은 옆으로 진행하는 액션 게임이었습니다. 배트맨이 뛰고 때리고 보스를 잡는, 예상 가능한 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PC엔진으로 나온 이 배트맨은 다릅니다. 화면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미로 같은 건물 안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찾습니다.
원래는 이 게임도 횡스크롤 액션으로 발표되었다가 도중에 방향을 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같은 시기 다른 기기의 배트맨 게임들과 전혀 다른 물건이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PC엔진 배트맨"이라고 하면 별도의 게임으로 이야기됩니다.
어떤 게임인가
배트맨(Batman)은 PC엔진용 액션 게임입니다. 영화의 무대인 고담시의 장소들을 배경으로 삼은 다섯 개 스테이지를 돌면서, 미로처럼 얽힌 통로를 탐색하고 적을 처리하며 필요한 물건을 모으는 구성입니다.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이라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기본 행동은 이동과 공격, 그리고 아이템 사용입니다. 배트맨은 주먹으로 싸우기도 하고 배터랭 같은 도구를 던지기도 합니다. 스테이지 안에는 문과 스위치, 열쇠에 해당하는 물건이 흩어져 있어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고 순서대로 처리해야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총알을 피하는 순발력보다 길을 기억하는 머리가 더 필요한 게임입니다.
미로를 푸는 법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답답해하는 부분은 방향 감각입니다. 통로가 비슷하게 생겨서 어디를 지나왔는지 헷갈리기 쉽습니다. 요령은 한쪽 벽을 정해 놓고 그 방향으로 계속 도는 것입니다. 무작정 앞으로 가다 보면 같은 곳을 두세 번 지나게 되는데, 규칙을 정해 놓고 움직이면 훨씬 적게 헤맵니다.
시간 제한이 걸려 있는 것도 압박이 됩니다. 여유 있게 구석구석 뒤질 수 있는 구성이 아니라, 목표를 파악한 뒤에는 최단 경로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첫 시도는 지도를 익히는 데 쓰고, 두 번째부터 제대로 도전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이 게임만의 것
같은 원작을 다룬 다른 기기의 배트맨들과 비교하면 성격이 뚜렷하게 갈립니다. 8비트 기기의 배트맨은 벽을 타고 오르는 액션으로 이름을 얻었고, 그쪽은 순전히 손기술을 요구합니다. 반면 이 게임은 액션이 있긴 하지만 무게 중심이 탐색에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면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앞으로 못 갑니다.
배트맨이라는 소재를 생각하면 이 선택이 이상하지만은 않습니다. 원작의 배트맨은 정면에서 힘으로 부수는 인물이라기보다 조사하고 준비하는 인물입니다. 도구를 챙기고 건물 구조를 파악해 침투하는 그림이, 미로 탐색이라는 형식과 어울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만든 곳과 기기 사정
이 게임을 만든 곳은 배트맨 게임을 여러 기기에 내놓던 회사입니다. 같은 판권으로 기기마다 전혀 다른 게임을 만드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었고, 이 회사는 그 작업을 특히 많이 맡았습니다. 기기의 성격에 맞춰 매번 다른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같은 회사가 만든 배트맨들 사이에도 공통점이 별로 없습니다.
PC엔진은 화면에 색을 많이 뿌릴 수 있는 기기였습니다. 이 게임은 그 장점을 어두운 도시의 분위기를 내는 데 썼습니다. 밤의 고담시를 표현한 배경 색감과 캐릭터의 큼직한 그림이 이 기기의 성능을 잘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다만 이 게임은 일본에서만 나왔고 북미로는 넘어가지 않아, 접해 본 사람의 폭이 좁습니다.
한국에서의 자리
한국에서 PC엔진은 소수의 기기였습니다. 패미컴이나 이후의 슈퍼패미컴처럼 흔하지 않았고, 게임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어린 시절에 직접 해 본 사람은 많지 않고, 대개는 나중에 이 기기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발견하게 되는 쪽입니다.
영화 배트맨이 국내에서도 크게 화제였던 만큼 배트맨 게임에 대한 기대는 컸습니다. 그 기대를 안고 이 게임을 켜면 예상과 다른 화면이 나오지만, 몇 번 헤매다 미로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하면 나름의 재미가 붙습니다. 액션으로 시원하게 부수는 게임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고, 차분히 길을 외우는 게임을 좋아한다면 오래 붙잡게 되는 부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