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KSILGAME

멀티 게임 96

멀티 게임 96 (Multi Game 96 Italy) · 1996 · Barko

방향버튼ASZX보조QERT동전Shift시작Enter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동전을 넣으면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목록이 뜹니다. 여러 게임이 한 기판에 담겨 있어서, 손님이 그중 하나를 골라 하는 방식입니다. 1990년대 오락실을 다녀 본 사람이라면 이런 기계를 기억할 것입니다. 한 대 자리에 게임 하나만 놓기 아까운 구석 자리나, 문방구 앞 좁은 공간에 놓이던 기계가 대개 이런 모음집 기판이었습니다.

멀티 게임 96(Multi Game 96)은 여러 게임을 한 기판에 담아 골라서 할 수 있게 만든 아케이드 모음집입니다. 바르코가 1996년에 내놓았고, 동전 하나로 목록에서 원하는 게임을 골라 들어가는 구성입니다. 오락실 주인 입장에서는 기계 한 대로 여러 취향의 손님을 받을 수 있고, 손님 입장에서는 지겨워지면 다른 게임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멀티 게임 96 기타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96)

모음집 기판이 왜 그렇게 많았나

이런 기판이 흔했던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락실은 자리가 곧 비용입니다. 기계 한 대가 차지하는 면적은 정해져 있는데, 거기에 놓은 게임이 손님을 못 끌면 그 자리는 매일 손해를 봅니다. 특히 대형 오락실이 아니라 동네 가게나 문방구 앞처럼 기계를 한두 대만 놓는 곳에서는 이 위험이 훨씬 큽니다.

모음집 기판은 그 위험을 나눕니다. 여러 게임이 들어 있으니 한 게임이 인기가 없어도 다른 게임이 손님을 붙잡고, 손님 취향이 갈려도 같은 기계 앞에 세울 수 있습니다. 격투를 좋아하는 학생과 퍼즐을 좋아하는 학생이 같은 기계에 동전을 넣게 만드는 셈입니다.

또 하나는 회전율입니다. 게임 하나에 물린 손님은 오래 앉아 있지만, 목록에서 이것저것 골라 보는 손님은 짧게 여러 판을 합니다. 짧은 판이 반복되면 동전이 더 자주 들어가고, 자리가 비는 시간도 줄어듭니다. 기판 값이 저렴한 편이었던 것까지 더하면 작은 가게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골라서 한다는 경험

이런 기계 앞에 앉으면 진행이 조금 달라집니다. 게임 하나짜리 기계에서는 그 게임을 파고들게 되지만, 모음집 앞에서는 목록부터 훑게 됩니다. 뭐가 있는지 구경하고, 그림이 마음에 드는 것부터 눌러 보고, 재미없으면 다음 걸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이런 기판을 잘 쓰는 요령은 처음 몇 판을 탐색에 쓰는 것입니다. 목록에 있는 게임들을 한 번씩 짧게 들어가 보고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을 두어 개 찾아낸 다음, 그다음부터 그 게임에 집중하는 순서가 좋습니다. 처음부터 한 게임만 붙잡으면 정작 더 재미있는 것이 목록 뒤쪽에 있는데 못 보고 지나갑니다.

들어 있는 게임들은 대체로 규칙이 단순하고 한 판이 짧은 부류입니다. 오래 붙잡고 파고드는 대작을 담기에는 기판 용량과 구조가 맞지 않고, 애초에 짧게 여러 판 돌리는 것이 이런 기계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대치도 그에 맞춰 잡는 편이 좋습니다. 한 게임을 깊이 파는 재미가 아니라, 여러 게임을 가볍게 맛보는 재미입니다.

국내 기판 업계라는 배경

바르코는 1990년대에 아케이드 기판을 만든 국내 업체 중 하나입니다. 당시 국내에는 이런 회사가 여럿 있었고, 대체로 자체 개발과 기존 인기 장르의 재구현을 섞어 가며 오락실에 기판을 공급했습니다. 대형 일본 회사와 정면으로 겨루기보다, 값이 싸고 설치가 쉬운 기판으로 동네 오락실 수요를 채우는 것이 이들의 자리였습니다.

1996년이라는 시점도 배경으로 볼 만합니다. 이 무렵 오락실 주류는 대전 격투와 3D 게임 쪽으로 넘어가 있었고, 대형 기판은 값이 크게 올랐습니다. 그 흐름을 따라갈 여력이 없는 작은 가게에는 저렴한 기판이 필요했고, 모음집 기판은 그 수요에 정확히 맞는 물건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오락실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무렵이기도 합니다. 가정용 게임기와 개인용 컴퓨터가 빠르게 퍼지면서 오락실에 오던 발길이 줄어들었고, 작은 가게일수록 타격이 컸습니다. 모음집 기판이 유독 많이 돌았던 것도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켜 본다면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런 기판에 담긴 게임 하나하나가 대단한 완성도를 갖췄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그 시절 동네 오락실의 기계 한 대 앞에 서 있는 느낌은 이런 기판이 가장 잘 전해 줍니다. 화려한 간판 게임이 아니라, 문방구 앞이나 가게 구석에서 하루에 몇 판씩 돌아가던 그 기계 말입니다.

목록을 훑으며 뭐가 있나 구경하는 것 자체가 이 기판을 켜는 이유가 됩니다. 브라우저에서 설치 없이 바로 켤 수 있으니, 짧게 여러 게임을 돌려 보면서 1990년대 국내 기판이 어떤 게임들을 담고 있었는지 확인해 보기에 좋습니다. 한 게임을 오래 붙잡을 생각이 아니라면 오히려 이런 모음집이 더 편한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