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패미컴)
배트맨 더 비디오 게임 (Batman the Video Game Europe) · 1989 · Sun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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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벽 사이를 튕겨 오르던 검은 망토
배트맨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게임은 셀 수 없이 많지만, 패미컴으로 나온 이 작품만큼 원작 영화의 분위기를 화면에 옮겨 놓은 게임은 드뭅니다. 팀 버튼 감독의 1989년 영화가 세계적으로 흥행하던 시기에 나왔는데, 정작 게임 속 고담은 영화보다 더 어둡고 더 기계적입니다. 보라색과 청록색이 뒤섞인 배경, 굴뚝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공장 지대, 하수도의 파이프. 8비트 색 몇 개만으로 이렇게까지 음침한 도시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이 게임을 기억하게 만드는 건 삼각 점프입니다. 벽에 붙은 상태에서 반대쪽으로 점프하고, 다시 그 벽에서 튕겨 오르는 동작을 반복하면 수직으로 된 통로를 끝까지 타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흔한 조작이지만 당시에는 낯선 감각이었고, 이 동작 하나 때문에 게임의 레벨 디자인 전체가 달라졌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배트맨 (패미컴)(Batman: The Video Game)은 선소프트가 패미컴으로 낸 횡스크롤 액션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배트맨이 되어 고담의 뒷골목, 공장, 하수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성당 첨탑까지 다섯 개의 스테이지를 돌파하며 조커에게 다가갑니다.
기본 공격은 주먹이지만, 스테이지 곳곳에서 얻는 아이템으로 세 가지 보조 무기를 쓸 수 있습니다. 직선으로 날아가는 배터랭, 위쪽 대각선으로 발사되는 스피어 건, 그리고 앞쪽 넓은 범위를 덮는 디스퍼전. 무기마다 소모하는 게이지 양이 달라서, 아껴 쓸 곳과 몰아 쓸 곳을 나누는 게 실력입니다.
아프도록 어려운 난도
이 게임은 정직하게 어렵습니다. 적의 배치가 지독하리만치 얄궂어서, 점프하는 순간 정확히 그 자리로 총알이 날아오는 구간이 여럿 있습니다. 특히 낭떠러지 위에서 밀려나는 판정을 받으면 그대로 추락사하기 때문에, 적을 피하는 것보다 밀려나지 않게 서는 위치를 잡는 게 더 중요합니다.
삼각 점프 구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벽 사이 간격이 넓은 곳에서는 타이밍을 한 번만 놓쳐도 바닥까지 떨어지고, 올라가는 도중에 날아다니는 적이 끼어들면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결국 구간 전체를 외워서 한 호흡에 통과하는 방식으로 익히게 됩니다.
보스전도 만만치 않습니다. 각 스테이지 끝에는 영화와 원작 만화에서 데려온 적들이 기다리는데, 대부분 정해진 패턴을 반복하지만 그 패턴 사이의 틈이 아주 좁습니다. 마지막 조커전은 대성당 종탑 위에서 벌어지고, 좁은 발판과 조커의 공격을 동시에 상대해야 합니다.
음악이 절반이다
선소프트 패미컴 게임 이야기를 할 때 음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회사는 패미컴의 음원 칩에서 유독 두꺼운 저음을 뽑아내는 기술로 유명했는데, 배트맨의 사운드트랙이 그 대표적인 결과물입니다. 첫 스테이지의 곡은 지금도 8비트 음악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고, 스테이지가 바뀔 때마다 곡의 색깔이 확 달라져서 도시를 옮겨 다니는 감각을 만들어 줍니다.
스테이지 사이에 들어가는 컷신도 인상적입니다. 큼직한 정지 화면과 몇 줄의 대사만으로 이야기를 이어 붙이는데, 카트리지 용량이 빠듯하던 시절에 이만큼 연출에 투자한 것 자체가 이례적입니다.
지금 다시 해 볼 만한 이유
요즘 나오는 액션 게임과 비교하면 분량은 짧습니다. 익숙해지면 삼십 분 남짓에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삼십 분에 도달하기까지 수십 번은 죽게 되고, 그 반복이 지겹지 않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 이 게임의 미덕입니다.
조작 반응이 즉각적이라 죽었을 때 게임 탓을 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시작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그 감각, 8비트 액션 게임이 잘 만들어졌을 때 나오는 특유의 손맛이 여기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