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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크미 애니메이션 팩토리

애크미 애니메이션 팩토리 (Acme Animation Factory Europe) · 1994 · Sun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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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기를 켰는데 적도 없고 점수도 없습니다. 대신 벅스 버니와 대피 덕이 화면에 서 있고, 이들을 움직여 짧은 만화를 직접 만들라고 합니다. 슈퍼패미컴 카트리지 중에서 이렇게까지 목적이 다른 물건은 흔치 않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없는 대신, 만든 것을 저장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애크미 애니메이션 팩토리(Acme Animation Factory)는 루니 툰 캐릭터들을 재료로 그림을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창작 도구이자, 그 사이사이에 간단한 놀이가 섞여 있는 모음집입니다. 슈퍼패미컴용 마우스를 지원해서, 패드로도 할 수 있지만 마우스를 꽂으면 훨씬 제대로 쓸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애크미 애니메이션 팩토리 기타 게임 화면 1 - 슈퍼 패미컴 (1994)

무엇을 할 수 있나

크게는 그림 도구와 애니메이션 도구로 나뉩니다. 그림 쪽에서는 선을 긋고 색을 채우고, 미리 들어 있는 캐릭터와 배경 조각을 화면에 가져다 붙일 수 있습니다. 붓과 색을 고르는 방식이 컴퓨터 그림판과 비슷해서, 마우스를 잡아 본 적이 있다면 설명 없이도 손이 갑니다.

애니메이션 쪽이 이 소프트의 중심입니다. 장면을 여러 장 만들고 순서대로 이어 붙이면 움직이는 짧은 만화가 됩니다. 캐릭터의 위치를 조금씩 바꿔 가며 여러 장을 만들어 두고 재생하면, 벅스 버니가 화면을 가로질러 걸어갑니다. 애니메이션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손으로 직접 겪게 되는 구조입니다.

여기에 소리도 붙일 수 있습니다. 준비된 음악과 효과음을 장면에 얹으면, 그림과 소리가 함께 재생되는 완성된 짧은 작품이 나옵니다. 다 만든 것은 저장해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불러올 수 있습니다.

애크미 애니메이션 팩토리 기타 게임 화면 2 - 슈퍼 패미컴 (1994)

사이사이 들어간 놀이

창작만 계속하면 지루해질 수 있어서인지, 카드 놀이 몇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혼자 하는 카드 맞추기와, 같은 그림을 찾아 짝을 맞추는 기억력 놀이가 대표적입니다. 규칙이 단순해서 잠깐 손을 풀 때 하기 좋습니다.

이 놀이들은 어디까지나 곁다리입니다. 이것만 보고 이 카트리지를 고를 이유는 없고, 그림을 그리다 쉬어 갈 때 들르는 정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만 어린 사용자를 겨냥한 물건이라는 성격을 생각하면, 지루함을 덜어 주는 장치로는 제 몫을 합니다.

패드로 할 때와 마우스로 할 때

이 소프트의 경험은 무엇을 손에 쥐었느냐에 따라 크게 갈립니다. 패드로 하면 커서를 방향키로 한 칸씩 밀어야 해서, 선 하나를 긋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세밀한 그림은 사실상 포기하게 됩니다.

마우스를 꽂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커서가 손을 따라오니 그림을 그린다는 감각이 제대로 살아나고, 조각을 옮겨 배치하는 작업도 훨씬 빨라집니다. 이 소프트가 원래 어떤 물건으로 기획되었는지는 마우스를 써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물건이 나온 배경

슈퍼패미컴 시절에는 게임기를 게임 이외의 용도로 쓰게 하려는 시도가 여럿 있었습니다. 마우스라는 주변기기가 나온 것 자체가 그런 흐름의 일부였고, 그림 그리기와 음악 만들기를 내세운 소프트들이 그 주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카트리지도 그 계열에 속합니다.

캐릭터로 루니 툰을 고른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아이가 아는 얼굴이 화면에 있으면 도구를 만지는 문턱이 훨씬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소프트는 게임을 잘하는 사람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 사용자를 겨냥해 만들어졌고, 그 목표에는 충실합니다.

국내에서

한국에서 이 카트리지를 접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화면에 나오는 안내가 전부 영어인데, 이런 도구형 소프트는 액션 게임과 달리 글을 읽지 않으면 무엇을 누르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슈퍼패미컴용 마우스를 갖춘 집이 드물어서, 이 소프트의 진짜 모습을 본 경우는 더 적었습니다.

그래서 이 물건은 오락실이나 문방구의 기억이 아니라, 게임기를 조금 다르게 써 본 경험 쪽에 남습니다. 점수도 목숨도 없는 화면 앞에서 캐릭터를 한 칸씩 옮겨 가며 짧은 만화를 만들던 시간은, 같은 기기로 하던 다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릴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고 도구도 단순하지만, 애니메이션이 결국 그림 여러 장이라는 사실을 손으로 알려 준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