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시어
엑셀시어 (Excelsior SET 1) · 1996 · Playmark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벽돌 뒤에 뭐가 있길래
1990년대 중반 유럽 오락실에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블록 깨기인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기계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 게임도 그 부류입니다. 화면을 채운 블록을 깨 나가면 그 뒤에 가려져 있던 사진이 조금씩 드러나는 구조인데, 드러나는 것이 실사 성인 사진이라 어른 손님을 겨냥한 바 캐비닛용 기계였습니다. 이탈리아의 동명 성인 잡지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게임 자체보다 그 배치 방식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물건입니다.
어떤 게임인가
엑셀시오르(Excelsior)는 화면을 가득 채운 블록을 깎아내면서 그 아래에 숨은 그림을 드러내는 액션 퍼즐입니다. 플레이어는 드릴을 든 캐릭터를 조종해 블록을 파고들며 나아가고, 그러는 동안 일정 간격으로 등장하는 방해 요소들을 총으로 쏘거나 폭탄으로 처리하거나 피해 다닙니다. 한 스테이지를 다 파내면 다음으로 넘어가고, 스테이지 사이에는 방해 요소가 없는 보너스 판이 끼어들어 벽을 자유롭게 부수면서 숨은 아이템과 점수를 챙길 수 있습니다.
핵심은 파는 순서입니다. 블록을 아무렇게나 깎아 나가면 스스로 판 통로에 갇혀 도망갈 길이 없어집니다. 이런 굴착형 게임의 오래된 요령이 그대로 통합니다. 막다른 길을 만들지 말고 항상 두 방향 이상 빠져나갈 통로를 남겨 두면서 파는 것, 적이 몰려오는 방향의 반대쪽을 미리 뚫어 두는 것, 그리고 굳이 다 깎지 않아도 되는 구간은 남겨 두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파워업과 한 판의 흐름
진행 중에 이따금 아이템이 튀어나옵니다. 화력을 올려 주는 것, 파는 속도를 높여 주는 것 등이 있고, 이걸 얼마나 일찍 손에 넣느냐가 그 판의 난이도를 좌우합니다. 초반 스테이지에서 여유 있을 때 아이템을 챙겨 두면 후반의 빡빡한 구간을 훨씬 수월하게 넘길 수 있으니, 눈앞의 진행 속도만 보지 말고 아이템이 있을 만한 자리를 훑고 가는 편이 낫습니다.
한 판의 흐름 자체는 단순합니다. 목표가 눈에 보이고, 파낸 만큼 화면이 열리니 진척도가 즉시 보상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게임은 딱 그 즉각적인 피드백 하나로 사람을 붙잡습니다. 조금만 더 파면 다 보일 것 같은 상태를 계속 만들어 주는 것이 설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지점
가장 많이 죽는 이유는 위치 파악 실패입니다. 화면 대부분이 아직 블록으로 덮여 있는 상태에서는 적이 어디쯤 있는지 보이지 않는데, 통로를 좁게만 파면 적과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피할 공간이 없습니다. 좁은 굴을 길게 파는 대신 넓은 방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서 싸우는 쪽이 안전합니다.
두 번째는 폭탄을 아끼는 습관입니다. 이런 기계는 대체로 한 판이 짧고 회전이 빨라 자원을 모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쓰는 것이 맞습니다. 목숨 하나가 곧 동전 한 닢이던 시절 기계 앞에서는 아끼다 죽는 것이 가장 손해였습니다.
플레이마크라는 회사
플레이마크는 이탈리아의 아케이드 기판 제조사입니다. 1990년대 유럽에는 일본과 미국 대형 회사들의 그늘 아래에서 자국 시장과 바 캐비닛 시장을 겨냥한 중소 제조사들이 여럿 있었고, 이 회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대형 회사의 히트작을 참고한 구조 위에 자기들 소재를 얹어 값싸게 공급하는 방식이 이 부류 회사들의 일반적인 노선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 회사가 마지막으로 내놓은 동전 투입식 게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아케이드 시장 자체가 급격히 줄었고, 3D 하드웨어 경쟁에 뛰어들 여력이 없던 중소 제조사들이 차례로 손을 뗐습니다. 이 게임은 그 마지막 시기의 산물인 셈입니다.
한국 오락실 사정과 지금 보는 재미
이런 성인 대상 기계는 한국 동네 오락실에서 정식으로 놓일 자리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오락실은 학교 앞이나 문방구 옆에 붙어 있는 아이들 공간이었고, 기판 유통 경로도 일본 쪽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국내에서 통용된 별칭조차 없이 원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이 게임이 흥미로운 지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1990년대 유럽의 아케이드 시장이 일본과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오락실이라는 공간이 나라마다 어떤 자리에 놓여 있었는지를 기계 한 대가 그대로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브라우저에서 바로 켜 보면 블록 깨기 한 판이 어떻게 전혀 다른 목적의 기계가 되는지, 그 시절 유럽 바 한구석의 풍경이 어렴풋이 짐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