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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챔프 92

유로 챔프 92 (Euro Champ 92 World) · 1992 · Ta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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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게임에서 반칙을 하면 보통 휘슬이 울립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다릅니다. 심판이 못 보면 그만입니다. 상대를 뒤에서 걷어차든 밀어 넘어뜨리든, 심판의 시야에 걸리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90년대 초 오락실에서 이 게임이 사람을 모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축구를 하러 앉았다가 격투를 하고 나오는 겁니다.

유로 챔프 92(Euro Champ '92)는 타이토가 만든 4인 동시 플레이 축구 게임입니다. 조이스틱과 슛, 패스 두 버튼으로 조작하며, 네 명이 나란히 앉아 편을 갈라 붙을 수 있습니다. 타이토가 1991년에 낸 햇 트릭 히어로를 유럽 시장에 맞게 손본 판으로, 출전 팀이 열두 개로 늘어났습니다.

유로 챔프 92 스포츠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92)

반칙이 전략이 되는 축구

이 게임의 반칙 시스템은 단순한 장난이 아닙니다. 실제로 전략의 일부입니다. 상대가 역습으로 달려 나갈 때 정면에서 막기 어렵다면, 뒤에서 걷어차 넘어뜨리는 게 확실합니다. 문제는 심판이 어디를 보고 있느냐입니다.

그래서 화면을 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공과 선수만 보는 게 아니라 심판의 위치를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심판이 반대편에 있을 때가 기회고, 가까이 있으면 정직하게 수비해야 합니다. 축구 게임을 하면서 심판 눈치를 보게 만든다는 발상이 이 게임의 정체성입니다.

물론 걸리면 대가를 치릅니다. 프리킥을 내주거나 그 이상의 처벌을 받습니다. 위험을 감수할지 말지를 매 순간 판단하게 만드는 구조라, 겁 없이 하는 사람과 조심하는 사람의 경기가 완전히 다르게 흘러갑니다.

유로 챔프 92 스포츠 게임 화면 2 - 오락실 (1992)

슈퍼 슛과 에이스 스트라이커

또 하나 눈에 띄는 장치가 슈퍼 슛입니다. 남은 시간이 30초 이내이고 동점이거나 한 골 뒤지고 있을 때, 팀의 간판 선수가 사실상 막을 수 없는 슛을 날릴 수 있습니다. 지고 있는 쪽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장치입니다.

이 규칙 때문에 경기 막판의 긴장감이 남다릅니다. 한 골 앞서고 있는 쪽은 마지막 30초를 어떻게든 버텨야 하고, 지고 있는 쪽은 어떻게든 그 선수에게 공을 붙여야 합니다. 앞서 있다고 안심할 수 없고 지고 있다고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오락실 게임다운 설계입니다.

여기에 팀마다 득점 확률이 높은 전담 선수가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나 슛을 쏘는 게 아니라 그 선수에게 공을 연결하는 것이 공격의 기본 형태가 됩니다. 그래서 패스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행동이 됩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헤매는 부분

축구 게임을 처음 잡으면 대개 공만 쫓아다닙니다. 이 게임에서 그러면 곧바로 밀립니다. 조종하는 선수는 공에 가까운 한 명으로 자동으로 바뀌는데, 그 전환 타이밍을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선수를 조종하다 골을 먹습니다.

두 번째는 슛 버튼을 너무 일찍 누르는 것입니다. 이 시절 오락실 축구 게임은 슛의 방향과 세기가 누른 시점과 이동 방향에 좌우됩니다. 골대를 정면으로 보고 있을 때 쏘는 것과 몸이 틀어진 상태에서 쏘는 것의 결과가 완전히 다릅니다.

화면에는 확대 축소 효과와 작은 미니맵이 들어 있습니다. 미니맵은 초보에게 특히 유용합니다. 공만 보다 보면 뒤가 비어 있다는 걸 모르는데, 미니맵을 힐끗 보면 지금 우리 진영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습니다.

타이토 축구 계보의 한복판

이 게임의 뿌리는 1991년 햇 트릭 히어로입니다. 같은 게임이 지역에 따라 풋볼 챔프, 유로 풋볼 챔프 같은 이름으로 나갔고, 유로 챔프 92는 그 흐름 위에서 유럽 시장을 겨냥해 나온 판입니다.

이후로도 계보는 이어집니다. 햇 트릭 히어로 93, 그리고 그것이 여러 이름으로 나간 판들, 다시 햇 트릭 히어로 95와 슈퍼 풋볼 챔프까지 타이토는 이 계열을 꾸준히 이어 갔습니다. 반칙이 허용되는 축구라는 발상 하나로 몇 년을 버틴 셈입니다.

오락실에서 넷이 앉던 게임

한국 오락실에서 축구 게임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슈팅이나 격투처럼 혼자 파고드는 게 아니라 여럿이 앉아 시끄럽게 하는 종류였기 때문입니다. 4인용 기계 앞에 넷이 앉으면 그 주위로 구경꾼이 붙었습니다.

특히 반칙이 통한다는 점이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놀거리였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축구를 하는 게 아니라 친구를 걷어차서 이기는 게임이었으니까요. 골을 넣는 것보다 상대를 넘어뜨리는 데 더 열을 올리는 판이 흔했습니다.

지금 다시 해 봐도 그 감각은 그대로입니다. 축구 시뮬레이션으로서는 엉성하지만, 여럿이 붙어 놀기에는 여전히 잘 만든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