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역습
제국의 역습 (The Empire Strikes Back) · 1985 · Atari G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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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만 그린 설원의 전장
화면이 켜지면 검은 바탕 위에 하얀 선들이 떠오릅니다. 색을 칠한 그림이 아니라 윤곽선만 남은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선들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묘하게도 어떤 촘촘한 도트 그림보다 더 실감이 납니다. 거대한 네발 보행 병기가 지평선에서 걸어 나오고, 그 다리가 점점 굵어지며 화면을 채우는 장면은 선 몇 개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압도됩니다.
이게 벡터 그래픽의 힘입니다. 당시 흔했던 도트 방식은 화면을 잘게 쪼갠 점으로 그리기 때문에 물체가 커지면 계단처럼 거칠어졌습니다. 반면 벡터 방식은 전자빔으로 선을 직접 그어대는 방식이라, 아무리 확대해도 선이 날카롭게 유지되고 밝기가 형광등처럼 또렷합니다. 1인칭으로 무언가가 달려드는 연출에는 이만한 게 없었습니다.
무엇을 하는 게임인가
제국의 역습(The Empire Strikes Back)은 같은 회사가 앞서 만든 스타워즈 벡터 슈팅 게임의 뒤를 잇는 작품입니다. 앞선 작품이 영화 1편의 클라이맥스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영화 2편의 장면들을 무대로 삼습니다.
플레이어는 조종석에 앉은 시점으로 화면을 바라봅니다. 시야 한가운데 조준선이 있고, 적과 지형물이 화면 안쪽 깊은 곳에서 바깥으로 밀려나오듯 다가옵니다. 할 일은 단순합니다. 다가오는 것을 조준해 쏘고, 쏠 수 없는 것은 피합니다. 레버로 조준선을 움직이고 버튼으로 발사하는 게 조작의 거의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화면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려나는 원근 표현 때문에, 실제로는 조준이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멀리 있을 때는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던 목표가 가까워질수록 급격히 빨라져 화면 밖으로 튀어 나갑니다. 멀리 있을 때 미리 조준을 걸어 두는 습관이 점수를 가릅니다.
걸어오는 거대 병기를 상대하는 법
이 게임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건 역시 설원의 네발 보행 병기 구간입니다. 여러 대가 줄지어 다가오는데, 크고 튼튼해서 아무 데나 쏴도 잘 무너지지 않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은 몸통에 대고 계속 쏘다가 그대로 깔려 버립니다.
요령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짐작할 만한 곳에 있습니다. 다리나 그 관절처럼 상대적으로 약한 부위를 노리는 것이 몸통을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입니다. 물론 그 부위는 작고 계속 움직이니, 조준선을 흔들며 난사하기보다 목표가 조준선 앞을 지나갈 자리에 미리 대 놓고 기다리는 쪽이 잘 맞습니다.
또 하나, 상대도 계속 쏩니다. 화면 곳곳에서 광선이 날아오는데 조준에만 정신이 팔리면 순식간에 기체가 상합니다. 쏘는 것과 피하는 것 사이에서 리듬을 잡아야 하고, 이 리듬을 못 잡으면 아무리 명중률이 좋아도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장면이 계속 바뀌는 구성
이 게임은 한 가지 상황만 반복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차례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한 구간을 넘기면 전혀 다른 배경과 전혀 다른 성격의 전투가 이어집니다. 개활지에서 거대한 목표물을 상대하다가, 좁고 복잡한 공간을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으로 넘어가는 식입니다.
이런 구성 덕분에 한 판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대신 구간마다 요구하는 게 달라서, 앞 구간에서 통했던 방식이 다음 구간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크고 느린 목표를 정확히 때리는 감각과, 빠르게 스쳐 가는 작은 것들을 훑어 내는 감각은 전혀 다른 종류의 기술입니다.
짧게 즐기기 좋은 고전
요즘 기준으로 보면 화면은 소박합니다. 색도 거의 없고 선 몇 개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몇 분 붙들고 있으면 이상하게 빠져듭니다. 조준하고 쏘는 감각 자체가 좋고, 무언가가 눈앞까지 달려드는 압박감이 선 그림만으로도 제대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국내 오락실에서는 이런 벡터 기판이 흔치 않았습니다. 화면을 그리는 방식 자체가 달라 전용 모니터가 필요했고, 고장도 잦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물을 본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한 번 본 사람은 그 특유의 빛나는 흰 선을 좀처럼 잊지 못합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그 인상이 왜 그렇게 오래 남았는지 금방 이해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