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피 앤 래피
토피 앤 래피 (Toppy Rappy) · 1996 · SemiCom
게임 화면 하단에서 —키 변경 Controls Settings·저장·불러오기 Save State / Load State
1990년대 중반 한국 오락실에는 일본 인기작과 비슷한 결의 국산 기판이 심심찮게 놓여 있었습니다. 화면을 얼핏 보면 익숙한데 캐릭터도 배경도 처음 보는 것들입니다. 값이 싸서 동네 오락실이 부담 없이 들여놓을 수 있었던 그 자리를 채우던 게임들 중 하나가 이 작품입니다.
토피 앤 래피(Toppy & Rappy)는 세미콤이 1996년에 내놓은 아케이드 플랫폼 액션입니다. 옆에서 보는 시점의 한 화면짜리 스테이지를 오가며 발판을 뛰어다니고, 화면 안의 적을 정리해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구성입니다. 조작은 8방향 레버에 버튼 두 개로 아주 단순합니다.
어떤 게임인가
이런 계열 게임의 재미는 발판 위치와 적의 움직임을 읽는 데서 나옵니다. 화면이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그렇다고 쉬운 건 아닙니다. 적이 여러 마리 동시에 움직이면서 서로 다른 발판을 오가기 때문에, 하나를 잡으러 가는 사이 다른 하나가 뒤로 돌아옵니다.
버튼 두 개는 공격과 점프에 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점프의 감각입니다. 이런 게임은 대개 점프 도중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정도가 정해져 있는데, 그 폭을 몸에 익히기 전까지는 발판을 자꾸 놓치게 됩니다. 처음 몇 판은 적을 잡는 것보다 발판 사이를 안정적으로 오가는 감각을 익히는 데 쓰는 게 낫습니다.
처음 막히는 지점
한 화면 플랫폼 액션에서 초보자가 죽는 이유는 대부분 같습니다. 아래로 내려갈 때입니다. 발판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내려가서, 착지하자마자 적과 겹쳐 죽는 식입니다.
요령은 내려가기 전에 한 박자 쉬는 것입니다. 발판 끝에 서서 아래 상황을 확인하고, 적이 지나간 직후에 내려가면 착지 후 움직일 여유가 생깁니다. 반대로 위로 올라갈 때는 서둘러도 됩니다. 위쪽은 대체로 시야가 확보되어 있고, 올라가는 도중에 맞을 일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또 하나는 화면 구석에 몰리지 않는 것입니다. 좌우 끝에 붙으면 도망칠 방향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적을 처리할 때도 가급적 화면 중앙 쪽 발판에서 상대하고, 구석에는 잠깐 피할 때만 들어가는 식으로 움직이면 오래 버팁니다.
두 명이 함께
두 명이 동시에 붙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게임에서 둘이 하면 확실히 편해지지만, 둘 다 같은 적을 쫓아다니면 오히려 서로 방해가 됩니다. 화면 위아래로 나누거나 좌우로 나눠 각자 담당 구역을 정해 두면 훨씬 빨리 끝납니다.
동네 오락실에서 이런 게임이 잘 굴러갔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조작이 단순하니 옆에 앉은 친구가 바로 붙을 수 있고, 둘이 하면 진도가 나가니 동전을 계속 넣게 됩니다. 대전 격투처럼 실력 차가 그대로 드러나 한쪽이 흥미를 잃는 일도 적습니다.
세미콤이라는 회사
세미콤은 1990년대 한국 아케이드 기판을 만들던 개발사입니다. 이 시기 국내에는 자체 기판을 내놓는 회사가 여럿 있었습니다. 일본 대작 기판을 정식으로 들여오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익숙한 장르를 훨씬 싼값에 공급하는 국산 기판에 실수요가 있었습니다.
세미콤은 그 흐름 안에서 꽤 여러 편을 냈습니다. 퍼즐, 플랫폼 액션, 슈팅을 두루 만들었고,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아케이드 기판을 이어 갔습니다. 토피 앤 래피는 그 계보에서 중반에 놓인 작품으로, 회사가 조금 앞서 만들었던 액션 계열 작품들의 골격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이런 게임들의 자리는 대체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큰 오락실의 좋은 자리가 아니라, 동네 문방구 앞이나 골목 오락실 구석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사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앉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게임을 붙잡고 씨름하기보다, 몇 판이라도 진도가 나가는 게임을 하고 싶은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화려하지는 않아도 무엇을 하는 게임인지가 30초 만에 이해되고, 손이 익으면 그만큼 진도가 나갑니다. 그 시절 국산 아케이드 기판이 어떤 손님을 겨냥해 만들어졌는지가 화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