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시 월드
팬시 월드 (Fancy World Earth of Crisis) · 1996 · Un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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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화면 안에서 적을 전부 없애면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게임이 있습니다. 버블 보블이 만들어 낸 이 틀은 1990년대 내내 수많은 후속작과 아류작을 낳았고, 한국 업체들도 여기에 손을 댔습니다. 팬시 월드는 그 흐름의 늦은 자리에 있는 작품입니다. 파란 머리 소녀가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한다는 설정을 얹었지만,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것은 익숙한 한 화면 플랫포머의 감각입니다.
팬시 월드(Fancy World: Earth of Crisis)는 유니코가 1996년에 내놓은 아케이드 액션 게임입니다. 한 화면짜리 스테이지에 발판이 여러 층 놓이고 적이 돌아다닙니다. 주인공은 옆으로 에너지 구슬을 던져 적을 맞히는데, 한 번에 죽지 않고 세 번을 맞혀야 쓰러집니다. 화면의 적을 다 정리하면 그 판이 끝나고 곧바로 다음 화면이 뜹니다. 2인 동시 플레이를 지원해서 옆자리에 친구를 앉히면 정리 속도가 크게 빨라집니다.
세 번 때려야 죽는다는 것의 의미
이 장르의 게임들은 저마다 적을 처리하는 고유한 방식을 하나씩 들고 나왔습니다. 버블 보블은 거품에 가둬 터뜨렸고, 스노우 브라더스는 눈덩이로 굴려 뭉갰습니다. 팬시 월드는 그런 별난 장치 없이, 그냥 세 번 때리면 죽는 구조를 택했습니다. 그만큼 단순하지만 대신 한 마리를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이 차이가 실제 플레이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한 마리를 세 번 맞히는 동안 다른 적들이 계속 다가오므로, 서서 쏘는 것이 아니라 쏘면서 움직여야 합니다. 발판을 오가며 거리를 벌리고, 일직선상에 여러 마리가 겹치는 각도를 만들어 한 번에 때리는 것이 기본 요령입니다. 좁은 발판에 몰린 적들을 옆에서 훑듯이 쏘면 세 발이 금방 채워집니다.
반대로 가장 나쁜 상황은 좌우 양쪽에서 동시에 접근당하는 것입니다. 공격이 수평 한 방향으로만 나가므로 뒤에서 붙는 적에게는 손을 쓸 수 없습니다. 벽에 등을 붙이거나 발판 끝으로 이동해 적이 한쪽에서만 오게 만드는 위치 선정이 중요합니다.
아이템과 변수
바닥에 떨어지는 수집품이 여러 종류 있습니다. 점수만 주는 동전과 음식이 있고, 판세를 뒤집는 것들도 있습니다. 화면의 적을 전부 얼려 버리는 아이템이 나오면 그 판은 사실상 끝난 셈이라, 얼어 있는 동안 부지런히 정리하면 됩니다. 적을 한 방에 쓰러뜨리는 레이저를 얻으면 세 번 때려야 하는 답답함에서 잠시 풀려납니다. 이 게임에서 아이템이 곧 속도이자 안전입니다.
반대로 잘못 먹으면 손해인 것도 섞여 있습니다. 술병을 먹으면 조작 방향이 뒤집혀서, 오른쪽으로 가려는데 몸이 왼쪽으로 갑니다. 한 화면 플랫포머에서 조작 반전은 치명적입니다. 발판 사이를 건너뛰다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거나 적 품으로 걸어 들어가기 딱 좋습니다. 아이템이 떨어졌다고 무작정 달려가지 말고, 어떤 것인지 눈으로 확인한 뒤 집는 습관을 들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세계를 도는 스테이지와 보스
진행은 실제 나라들을 차례로 도는 형태로 짜여 있습니다. 영국이 나오고 브라질이 나오고, 이스터섬 같은 곳도 지나갑니다. 마지막에는 하늘 위가 무대가 됩니다. 지역마다 여러 개의 화면이 이어지고, 배경이 바뀌면 나오는 적의 종류와 발판 배치도 함께 바뀝니다. 닭이나 강아지처럼 순한 모습을 한 적이 있는가 하면 불과 얼음을 쓰는 괴물, 강시, 투명 인간까지 뒤섞여 나옵니다.
보스는 일정 구간마다 등장합니다. 폭탄 모양을 한 것, 선풍기를 단 로봇, 대포를 쏘는 것, 머리가 둘 달린 용 같은 식으로 생김새는 제각각입니다. 다만 마지막까지 가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최종 보스라 할 만한 새로운 적이 따로 없고 앞서 만났던 보스들을 다시 상대하는 구성으로 끝납니다. 용량 사정 탓으로 이야기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스테이지는 지금까지 익힌 보스 대처법을 총정리하는 시험처럼 흘러갑니다. 어느 쪽이든 여기서 난이도가 확 튑니다.
보스전이 이 게임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입니다. 화면 전체에 터지는 구슬을 뿌려 대는 데다, 그 와중에 일반 적들까지 계속 나와서 보스 쪽으로 가는 길을 막습니다. 공격이 수평으로만 나가기 때문에 보스와 높이를 맞춰야 하는데, 발판을 오르내리는 동안 피격 위험이 커집니다. 안전한 요령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딜을 넣을 수 있는 짧은 순간에만 붙고, 탄이 깔리기 시작하면 미련 없이 물러나 빈 곳으로 피합니다. 잔기가 여유 있을 때는 몸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방법이지만, 후반 보스는 그렇게 넘기기 어렵습니다.
조작감과 이 게임의 자리
솔직히 말하면 이 게임의 조작은 무거운 편입니다. 점프 입력에서 실제로 뜨기까지 반응이 살짝 늦고, 발판에 걸치는 판정도 관대하지 않습니다. 같은 장르의 잘 만든 작품들이 보여 준 경쾌함과 비교하면 답답하게 느껴지는 대목이 분명 있습니다. 처음 잡았을 때 실수로 떨어지는 일이 잦은 것은 실력 탓만은 아닙니다. 뜨는 타이밍이 늦다는 것을 알고 한 박자 먼저 누르면 훨씬 낫습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이런 한 화면 액션은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즐겨 앉던 자리였습니다. 대전 격투처럼 실력 차이로 기가 죽지 않고, 슈팅처럼 순식간에 죽지도 않으니 동전 하나로 오래 버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이 붙어 앉아 화면을 나눠 맡고, 아이템이 뜨면 서로 먼저 먹겠다고 다투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임입니다.
유니코와 그 시절 국내 개발
유니코는 1988년에 세워진 한국 업체입니다. 처음에는 오락실 기계 부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일로 시작했고, 1993년에 연구 개발 부서를 두면서 직접 게임을 만들기 시작해 국내에서 손꼽히는 아케이드 제조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드래곤 마스터, 버글러 X, 제로 포인트 같은 작품을 이어서 냈고, 2001년에 유니아나로 이름을 바꾼 뒤 온라인 쪽으로 무게를 옮겼습니다.
다만 팬시 월드의 만듦새에는 그 시절 국내 개발의 사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 게임은 데이터 이스트의 작품에서 가져온 코드 위에 새 그래픽과 스테이지를 얹은 형태로 알려져 있습니다. 밑바탕을 빌려 오고 그 위에 자기 것을 올리는 방식은 개발 기간과 비용을 크게 줄여 주지만, 원본의 한계도 함께 물려받습니다. 앞서 말한 무거운 조작감이나 마지막 보스가 비어 있는 구성 같은 것이 그 흔적으로 읽힙니다.
그래도 재미가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 화면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리듬은 이 장르가 원래 가진 힘이고, 여기서도 그 힘은 작동합니다. 짧게 몇 판 돌리기에는 지금도 나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