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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거

다이거 (Dyger Korea SET 1) · 1989 · Phil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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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오락실에 놓인 종스크롤 슈팅 게임 하나가 있었습니다. 화면은 여느 일본산 슈팅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기판을 뒤집어 보면 'Philko'라는 낯선 이름이 찍혀 있었습니다. 이 시절 국내 오락실을 채운 기판은 대부분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거나 그것을 그대로 베낀 복제품이었기 때문에, 자체 기획으로 만든 국산 슈팅이 화면에 올라온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 게임은 주인공이 여성 파일럿이고, 스테이지 사이에 짧은 컷신을 끼워 넣어 이야기를 이어가려 했습니다. 완성도를 떠나 야심만큼은 분명히 읽히는 작품이었습니다.

다이거(Dyger)는 필코가 1989년에 내놓은 세로 방향 스크롤 슈팅 게임입니다. 화면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플레이어는 아래쪽 기체를 조종하며 위에서 쏟아지는 적기와 지상 시설을 정리하면서 올라갑니다. 8방향 레버로 기체를 움직이고 버튼으로 사격하는, 이 장르에서 가장 익숙한 조작입니다. 설정은 꽤 무겁습니다. 다이거라는 방위 조직에 속한 여성 대원이 사고로 핵무기를 터뜨려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고, 오랜 죄책감 끝에 스스로를 냉동 수면에 넣습니다. 한참 뒤 외계 세력이 지구를 뒤덮은 시점에 깨어나 속죄하듯 홀로 싸움에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이거 슈팅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89)

공중과 지상을 따로 노리는 무기

이 게임에서 가장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은 무기가 둘로 나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늘을 나는 적기를 맞히는 대공 사격과, 땅에 붙어 있는 포대와 시설을 부수는 대지 사격이 따로 관리됩니다. 종스크롤 슈팅 중에는 한 발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게임이 훨씬 많기 때문에, 처음 잡으면 분명히 맞혔는데 지상 목표가 멀쩡히 남아 있는 상황에 당황하게 됩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판단이 달라집니다. 지상에 포대가 촘촘히 깔린 구간에서는 대지 화력을 먼저 올려두는 편이 안전하고, 반대로 편대 단위로 적기가 몰려오는 구간에서는 대공 쪽을 챙겨야 합니다. 아이템으로 화력을 올릴 수 있으므로, 눈앞의 점수보다 다음 구간에 무엇이 나오는지를 기억해 두고 미리 준비하는 쪽이 훨씬 오래 버팁니다.

두 계통을 모두 고르게 키우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한 번 죽으면 강화가 크게 후퇴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지금 살아남는 데 필요한 쪽부터 챙기게 됩니다. 무엇을 먼저 집을지 정하는 이 판단이 이 게임의 실질적인 재미입니다.

다이거 슈팅 게임 화면 2 - 오락실 (1989)

죽으면 되돌아가는 구조

이 게임은 그 자리에서 부활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해진 지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방식을 씁니다. 슈팅 게임에서 이 구조는 늘 잔인한 결과를 낳습니다. 강화가 벗겨진 맨 기체로, 강화된 상태를 전제로 짜인 구간을 다시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무너집니다. 화력이 없으니 적을 못 지우고, 적이 남으니 탄이 늘고, 탄이 늘어 또 맞는 흐름입니다. 이런 게임에서 초보자가 가장 자주 하는 실수는 여기서 조바심을 내며 앞으로 파고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화면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무리하게 점수를 노리지 않으면서, 아이템 하나만이라도 확보해 화력을 되살리는 데 집중하는 편이 회복 확률이 높습니다.

다이거 슈팅 게임 화면 3 - 오락실 (1989)

난이도가 튀는 지점

이 게임이 남긴 평가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가 보스전의 난이도입니다. 도중 구간은 익히면 넘어갈 만한데, 보스 앞에서 갑자기 벽이 하나 서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화력이 온전한 상태로 보스 앞에 도착했느냐 아니냐가 승패를 거의 결정하기 때문에, 사실상 보스전은 그 앞 구간에서 이미 판가름이 납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공략은 보스 패턴 암기보다 앞 구간 무피격에 가깝습니다. 화력을 온전히 들고 도착하면 보스가 짧게 끝나고, 한 번이라도 잃고 도착하면 화력이 모자라 오래 버티다가 결국 탄에 잡힙니다. 처음 하는 분이라면 보스 직전 구간에서는 점수용 지상 시설을 포기하고 안전한 자리에서 피하는 데 집중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필코라는 이름과 그 시절 사정

필코는 1985년에 세워진 국내 업체로, 1987년 무렵 아케이드 개발 부서를 두고 자체 게임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이 회사가 남긴 기록에는 그늘도 함께 있습니다. 1989년에 기판 불법 복제로 회사와 대표가 함께 처벌을 받은 일이 있었고, 회사는 1990년대 초반에 게임에서 손을 뗍니다. 국산 아케이드가 자리를 잡기 전, 복제와 창작이 뒤섞여 있던 시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력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보면 다이거의 위치가 조금 달리 보입니다. 완성도로 줄을 세우면 같은 시기 일본산 슈팅에 밀리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밸런스가 고르지 않고, 보스 난이도는 거칠고, 연출도 투박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세계관을 세우고 컷신을 넣고 이중 무기라는 나름의 규칙을 설계했다는 점은 남습니다.

당시 오락실 손님들은 기판을 만든 회사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화면이 그럴듯하고 한 판이 재미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이거는 국산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지도, 반대로 홀대를 받지도 않은 채 다른 슈팅들 사이에 섞여 놓였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오히려 그 점이 흥미롭습니다.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슈팅 게임 하나를 처음부터 만들어 보려 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었는지가, 이 한 판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