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트 폭스
더트 폭스 (Dirt Fox Japan) · 1989 · Nam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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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실 레이싱이라고 하면 대부분 포장도로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1989년 남코가 내놓은 이 게임은 처음부터 아스팔트를 버리고 흙길로 나갔습니다. 화면은 세로로 세워져 있고, 시점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입니다. 핸들과 두 개의 페달이 달린 캐비닛 앞에 앉으면 눈앞에서 자기 차가 흙먼지를 뿌리며 미끄러지는데, 그 감각이 당시 어떤 레이싱 게임과도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이 기계는 여러 대를 케이블로 이어 붙일 수 있었습니다. 최대 여덟 대까지 연결하면 여덟 명이 같은 코스를 동시에 달렸습니다.
더트 폭스(Dirt Fox)는 남코가 시스템 2 기판으로 만든 오프로드 랠리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색으로 구분되는 차 한 대를 몰고, 보라색 CPU 차량 네 대에서 일곱 대를 상대로 흙길 코스를 달립니다. 1인은 빨강, 2인은 초록, 3인은 파랑, 4인은 노랑 차를 배정받아 화면에서 자기 차를 바로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만 출시되어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기계이고, 지금도 남아 있는 실물 캐비닛이 몇 대 되지 않는 희귀한 물건입니다.
한 판이 어떻게 흘러가는가
이 게임의 규칙은 체크포인트 방식입니다. 코스 전체가 여섯 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고, 구간마다 제한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시간 안에 그 구간을 통과하면 남은 시간에 새 시간이 더해지고 다음 구간으로 넘어갑니다. 통과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탈락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탈락해도 레이스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살아남은 다른 플레이어들의 경기는 계속 진행됩니다. 여러 대를 연결한 오락실에서는 옆자리 사람이 먼저 떨어져 나가고 나 혼자 남아 시간과 싸우는 상황이 자주 나왔습니다. 반대로 내가 먼저 떨어지면 남의 화면을 구경하며 다음 판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순위 싸움이면서 동시에 시간 싸움입니다. 앞차를 추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다음 체크포인트까지 시간을 남겨 도착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리한 추월로 벽에 박아 몇 초를 잃으면 그 손해가 다음 구간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흙길을 모는 감각
오프로드 레이싱의 핵심은 접지력입니다. 포장도로 게임에서는 코너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회전 반경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만, 흙길에서는 그렇게 하면 차가 계속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여서 코너 진입 전에 미리 속도를 죽여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부감 시점이라는 점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운전석 시점 게임은 시선이 진행 방향에 고정되어 있어 앞만 보면 되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화면에서는 차의 방향과 화면의 위쪽이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대신 코너 안쪽 상황과 다른 차의 위치가 한눈에 들어와서, 익숙해지면 추월 타이밍을 잡기가 오히려 편합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액셀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 제한이 있으니 밟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지만, 벽이나 장애물에 부딪혀 멈추면 잃는 시간이 감속으로 잃는 시간보다 훨씬 큽니다. 아슬아슬한 구간에서는 오히려 살짝 놓고 안정적으로 통과하는 쪽이 기록이 좋습니다.
남코의 연결 캐비닛 계보
여러 캐비닛을 이어 붙여 여럿이 동시에 겨루게 하는 방식은 남코가 1987년 파이널 랩에서 먼저 선보인 것입니다. 그전까지 레이싱 게임의 경쟁 상대는 대부분 CPU였고, 사람과 겨루려면 기록을 비교하는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여러 대를 묶어 같은 코스에 실제 사람 여럿을 올려놓은 순간 레이싱 게임의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더트 폭스는 그 방식을 오프로드로 가져온 작품입니다. 포장도로에서는 라인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 실력 차가 나면 순서가 잘 뒤집히지 않지만, 흙길에서는 미끄러짐 한 번에 순위가 바뀝니다. 여럿이 붙었을 때 더 시끄러워지는 쪽은 이런 노면입니다.
음악을 맡은 사람은 이후 릿지 레이서로 이름을 알리는 호소에 신지입니다. 남코의 레이싱 사운드가 어떤 흐름을 타고 왔는지 궁금하다면 이 게임의 곡들을 들어 볼 만합니다. 1989년 8월 일본 업계지 집계에서 대형 캐비닛 부문 12위에 오를 만큼 현지에서는 나름의 성적을 냈습니다.
지금 해 보면
이 게임은 국내 오락실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대형 캐비닛에 핸들과 페달이 달리고 여러 대를 이어야 제맛이 나는 구성이라 도입 비용이 컸고, 같은 시기 국내에서는 좀 더 대중적인 기계들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들어 봤어도 실제로 해 본 사람은 드문 축에 듭니다.
지금 브라우저에서 돌려 보면 여덟 명 동시 플레이는 재현되지 않지만, 여섯 구간을 시간에 쫓기며 통과하는 기본 구조는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부감 시점 오프로드라는 조합이 얼마나 독특했는지,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남코가 레이싱 장르에서 무엇을 시험하고 있었는지 확인하기에는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