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시아
로만시아 (Romancia) · 1986 · F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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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돌아가는 모험
이 게임을 시작하면 곧바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느긋하게 지도를 그리고 아이템을 모으며 즐기는 모험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안에 공주를 구해 내지 못하면 그대로 끝나는 구조입니다. 처음 하는 사람은 대개 어디로 가야 하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시간을 다 씁니다.
여기에 함정투성이 설계가 얹힙니다. 먹으면 안 되는 물건이 있고, 들어가면 안 되는 문이 있으며, 아무 표시 없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겹치는 바람에 이 게임은 나온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잔인한 게임의 대명사처럼 불립니다.
어떤 게임인가
로만시아(Romancia)는 옆에서 본 화면을 걷고 뛰며 진행하는 액션 RPG입니다. 왕자가 붙잡힌 공주를 구하러 낯선 나라로 넘어가고, 성과 마을과 지하를 오가며 필요한 물건을 찾아 길을 여는 것이 목표입니다.
전투는 부딪히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화려한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과 접촉하며 힘의 차이로 승부가 갈립니다. 그래서 무작정 몸으로 밀고 들어가면 순식간에 체력이 사라집니다. 필요한 것만 상대하고 나머지는 피해 지나가는 판단이 중요합니다.
지도는 넓지 않지만 길이 숨어 있습니다. 벽처럼 보이는 곳에 통로가 있고, 특정 물건을 가지고 있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습니다. 무엇을 어디서 써야 하는지 알아내는 과정이 사실상 이 게임의 본체입니다.
함정으로 가득한 설계
이 게임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적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잘못된 선택 하나가 곧바로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좋아 보이는 물건을 집었다가 저주에 걸리고, 열어 본 문 안에 갇히고, 아래로 뛰어내렸더니 돌아 올라올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제대로 즐기려면 실패를 각오하고 여러 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한 번 갈 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하나씩 알아내고, 다음 판에서는 그 함정을 피해 시간을 아끼는 식입니다.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것도 이 반복을 전제로 한 설계입니다. 요령을 알고 나면 한 판이 생각보다 짧게 끝납니다.
처음 하는 사람에게 권할 만한 것은 지도를 직접 그려 보는 일입니다. 어디에 무엇이 있었고 어느 문이 잠겨 있었는지 적어 두면, 다음 시도에서 헤매는 시간이 확 줄어듭니다. 이 시절 게임을 하던 사람들이 노트를 옆에 두고 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나 쓰러뜨리면 안 된다
이 작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마주치는 것을 전부 없애 버리는 방식으로는 좋은 결말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까지 손대면 그 대가가 돌아옵니다.
전투를 잘하는 것이 곧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 발상은 지금 봐도 독특합니다. 화면에 보이는 모든 것을 처리하도록 훈련된 사람일수록 이 게임에서 손해를 보게 되어 있어서, 습관을 거슬러야 하는 셈입니다.
팔콤의 1986년
이 게임을 만든 곳은 일본 컴퓨터 게임 초기를 대표하던 개발사입니다. 앞서 내놓은 던전 탐험 계열의 작품들이 크게 성공한 뒤였고, 바로 다음 해에는 접근성을 크게 낮춘 액션 RPG로 다시 한번 이름을 알립니다.
그 사이에 놓인 이 작품은 두 흐름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겉모습은 아기자기하고 색도 밝아서 쉬워 보이는데, 실제 내용은 앞선 작품들만큼이나 가혹합니다. 이 간극이 당시 이용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이 게임을 잊히지 않게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국내 이용자들에게
국내에서 이 개발사의 이름은 8비트 컴퓨터를 쓰던 사람들 사이에서 꽤 알려져 있었습니다. 잡지에 공략이 실리고, 팩을 구한 사람이 친구들에게 돌리며 정보가 오갔습니다. 정보가 곧 실력이던 시절이라,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아는 사람이 그 무리의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이 게임을 끝까지 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허무하게 죽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 남았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그 가혹함이 오히려 그 시절 게임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