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매너
보기 매너 (Bogey Manor) · 1985 · Tech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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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순 다음이 진짜 시작
보통 액션 게임은 목표를 다 채우면 판이 끝납니다. 이 게임은 다르게 굴러갑니다. 집 안의 수정구를 전부 부수는 순간, 화면이 흔들리며 저택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싸울 상대가 아니라 시간이 적입니다. 무너지는 집 안에서 출구를 찾아 달리는 그 마지막 몇 초가 이 게임에서 가장 손에 땀이 나는 구간입니다.
그래서 수정구를 부수는 동안에도 머릿속 한쪽으로는 나가는 길을 계산하게 됩니다. 마지막 수정구를 어디서 깰지에 따라 탈출의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규칙에 이 한 겹이 얹히면서 게임이 훨씬 입체적으로 변합니다.
어떤 게임인가
보기 매너(Bogey Manor)는 유령이 사는 저택에 들어간 소년이 집 안의 수정구를 모조리 깨부수는 액션 게임입니다. 주인공은 칼을 들고 층과 층 사이를 오르내리며, 유령과 괴물이 돌아다니는 복도를 지나 수정구를 찾아냅니다.
저택 구조가 독특합니다. 한 채의 집이 네 면으로 나뉘어 있고, 각 면마다 여러 층이 있습니다. 화면 위쪽에는 지금 어느 면의 어느 층에 있는지를 알려 주는 표시가 있어서, 이걸 보며 자기 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층을 옮기려면 계단을 타거나 문 안으로 뛰어드는데, 문 중에는 전혀 다른 층으로 보내 버리는 것도 있습니다.
적은 유령만이 아닙니다. 프랑켄슈타인을 닮은 덩치, 메두사 같은 것들이 각자의 구역을 돌아다니며 주인공을 쫓습니다. 이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면 손해라, 마법 장갑으로 잠깐 얼려 두고 그 사이에 칼로 처리하는 것이 기본 대응입니다.
지도를 읽는 게임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크게 헤매는 것은 길입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좁은 복도 한 칸뿐인데 저택은 네 면에 여러 층이니,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아직 안 갔는지가 금세 흐려집니다. 그러다 시간을 다 써 버리는 것이 가장 흔한 실패입니다.
요령은 위쪽 표시를 자주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한 면을 정하고 그 면의 층을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차례차례 훑은 다음 다음 면으로 넘어가면 빠뜨리는 곳이 줄어듭니다. 발길 닿는 대로 문에 뛰어들면 같은 자리를 몇 번씩 돌게 됩니다.
문의 성질을 기억해 두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문은 그냥 다른 층으로 보내 줄 뿐이지만, 반짝이는 문에 들어가면 특별한 아이템을 얻어 한동안 강해진 상태로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적이 몰려 답답할 때 이 문을 노리면 흐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난이도가 튀는 지점
난이도는 저택이 바뀔수록 조금씩 올라갑니다. 수정구가 더 구석진 곳에 놓이고, 돌아다니는 적의 수와 속도가 늘어납니다. 특히 계단 앞이나 문 바로 옆처럼 반드시 지나야 하는 좁은 길목에 적이 자리 잡으면 손쓰기가 어렵습니다. 이럴 때 급하게 밀고 들어가기보다 얼려 두고 지나가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탈출 구간도 뒤로 갈수록 사나워집니다. 남은 시간은 짧은데 출구는 멀고, 무너지는 와중에도 적은 그대로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숙련된 사람은 일부러 출구 가까운 쪽 수정구를 마지막까지 남겨 두고 깹니다. 이 한 가지 습관만으로 클리어율이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만든 곳과 국내에서의 자리
테크노스는 나중에 더블 드래곤과 열혈 시리즈로 오락실을 휩쓴 회사입니다. 보기 매너는 그 이름이 알려지기 전, 회사가 아직 여러 방향을 두드려 보던 시기의 작품입니다. 뒷날의 벨트스크롤 액션에서 보이는 시원한 타격감과는 결이 다르지만, 좁은 화면 안에 구조를 만들고 길을 헤매게 만드는 감각은 이때부터 있었습니다.
국내 오락실에서 보기 매너는 크게 유행한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훨씬 직관적인 액션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지도를 읽고 길을 외우는 이 게임의 성격은 한 판에 동전 하나를 쓰는 오락실 손님에게 친절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따로 불리던 별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그 점이 매력이 됩니다. 유령의 집이라는 소재를 액션 게임의 구조로 풀어낸 방식이 지금 봐도 낯설고, 무너지는 집에서 도망치는 마지막 장면은 짧은 시간에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