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온
사이온 (Scion) · 1984 · Seibu Den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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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팅 게임인데 적을 다 잡아도 앞으로 나가지지 않는 게임이 있습니다. 화면 가득 깔린 격자 모양 구조물을 부숴야만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1984년에 나온 이 게임은, 총알을 쏘는 것과 목표물을 무너뜨리는 것을 다른 일로 나눠 놓았습니다. 처음 붙잡은 사람은 대개 여기서 한참을 헤맵니다. 계속 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사이온(Scion)은 세로로 흐르는 화면에서 기체를 몰고 적 편대를 상대하는 종스크롤 슈팅입니다. 다만 진행의 열쇠가 사격이 아니라 폭탄에 있습니다. 공중에 나타나는 특정한 적기를 먼저 떨어뜨리면 폭탄 무장을 얻게 되고, 그 폭탄으로 바닥에 깔린 사각형 표적들을 차례로 지워야 구조물 전체가 무너지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한 판의 흐름
시작하면 위에서 적 편대가 내려옵니다. 여기까지는 여느 초기 종스크롤과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화면 아래쪽에 깔린 구조물입니다. 일반 사격으로는 흠집도 나지 않고, 그 위를 지나가는 동안 계속 공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순서를 잡아야 합니다. 먼저 폭탄을 주는 적기를 찾아 확실히 떨어뜨리고, 무장을 갖춘 다음에 표적을 하나씩 지워 나가는 겁니다.
표적을 전부 없애면 구조물이 무너지고 화면이 다음 층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도시의 층을 하나씩 뚫고 내려가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구조물 형태의 보스와 마주합니다. 도시의 중심부에 잡혀 있는 동료를 구한다는 설정이 깔려 있는데, 실제로 화면에서 느껴지는 건 층층이 쌓인 요새를 아래로 파고드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막히는 지점
가장 흔한 실수는 폭탄을 얻기 전에 구조물 위로 들어가는 겁니다. 아무것도 부술 수 없는 상태로 적의 사격만 받으니, 시간만 흐르고 목숨만 줄어듭니다. 화면에 구조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선 폭탄을 주는 적기가 나올 때까지 위쪽 안전한 자리에서 버티는 편이 낫습니다.
다음으로 잦은 실수는 폭탄을 아무 데나 떨어뜨리는 겁니다. 표적은 정해진 자리에 있고, 폭탄에는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기체를 표적 바로 위에 정확히 맞춘 다음 놓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화면을 급하게 훑기보다, 한 줄씩 차분히 지워 나가는 쪽이 결과적으로 훨씬 빠릅니다.
1984년이라는 시점
이 게임이 나온 해를 생각하면 구조가 꽤 도전적입니다. 당시 종스크롤 슈팅은 대체로 "올라가면서 쏜다"는 단순한 규칙으로 충분했는데, 여기서는 진행 조건 자체를 별도의 과제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덕분에 한 화면 안에서 할 일이 둘로 나뉘고,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생깁니다. 지금 기준으로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동시에 그 시절다운 불친절함도 그대로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화면이 알려 주지 않고, 규칙은 죽어 가며 알아내야 합니다. 요즘 게임이라면 튜토리얼로 처리했을 내용을, 동전 몇 개로 배우는 구조였던 셈입니다.
만든 곳의 계보
이 게임을 만든 회사는 훗날 라이덴 시리즈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곳입니다. 종스크롤 슈팅으로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된 그 계보의 출발점 언저리에, 이 작품이 놓여 있습니다. 앞서 낸 횡스크롤 슈팅에 이은 두 번째 슈팅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미 이 시점에 "지상 목표물을 처리하며 나아간다"는 발상이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라이덴 계열에서 공중 목표와 지상 목표를 나눠 쏘게 만든 설계를 떠올려 보면, 그 뿌리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물론 완성도는 후대작과 비교할 수 없지만, 무엇을 하려던 회사였는지는 충분히 읽힙니다.
지금 해 볼 만한가
화려한 탄막이나 시원한 파괴력을 기대하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기체는 느리고 총알은 소박하며, 화면은 단순합니다. 대신 규칙을 알아내는 재미가 있습니다. 처음 십 분은 무엇을 하는 게임인지 몰라 헤매다가, 폭탄과 표적의 관계를 깨닫는 순간 게임이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국내 오락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나온 시기도 이르고 이름도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대부분은 한참 뒤에야 이름을 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처음 만나더라도 크게 늦지 않았습니다. 짧게 한 판씩 붙잡고 규칙을 풀어 보기에 알맞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