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기
쇼기 (Shougi) · 1985 · Micro Ca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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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비트 컴퓨터가 장기를 두던 시절
1985년의 MSX는 메모리가 몇 킬로바이트 단위였습니다. 그 안에 반상 전체의 수를 읽는 프로그램을 넣는다는 것이 어떤 일이었을지 짐작해 보면, 이 작은 카트리지가 꽤 무모한 물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시기 일본에서는 장기나 바둑, 마작 같은 판 위의 놀이를 컴퓨터로 옮기려는 시도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정용 컴퓨터를 사려는 어른에게 화려한 액션 게임보다 이쪽이 훨씬 설득력 있는 명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장난감이 아니라 상대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언제든 한 판 둘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을 내세울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쇼기(Shougi)는 일본 장기를 컴퓨터와 두는 게임입니다. 화면에 아홉 칸씩 가로세로로 놓인 반상이 그려지고, 커서를 옮겨 말을 고른 뒤 놓을 자리를 지정하면 컴퓨터가 응수합니다. 그 반복이 게임의 전부입니다.
일본 장기는 우리 장기나 서양 체스와 규칙이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잡은 말을 자기 말로 삼아 반상 아무 데나 다시 내려놓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규칙 때문에 말을 교환해도 전력이 줄지 않고, 잡은 말이 손안에 쌓일수록 언제 어디에 떨어뜨릴지 계산해야 할 것이 늘어납니다.
또 하나는 승격입니다. 상대 진영 안쪽으로 들어간 말은 뒤집어 더 강한 움직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전진시키는 것 자체가 가치를 올리는 행위가 되고, 이 때문에 전투가 좀처럼 소강 상태에 빠지지 않습니다.
8비트 기계와 대국하는 감각
이 시대 가정용 컴퓨터의 사고 능력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데도 계산 시간이 걸리고, 그 몇 수마저 깊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기를 어느 정도 두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대등한 상대로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규칙을 익히는 도구로는 잘 작동합니다. 반칙 수를 두면 받아 주지 않으니 어떤 말이 어디로 갈 수 있는지가 저절로 손에 익고, 상대가 언제나 대기하고 있으니 몇 번이고 다시 둬 볼 수 있습니다. 실수해도 부끄러울 사람이 없다는 것도 초심자에게는 큰 장점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이 게임의 독특한 리듬을 만들기도 합니다. 수를 두고 나면 화면이 잠시 멈춘 채 기계가 생각하고, 그동안 이쪽도 다음 수를 그려 보게 됩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답답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대국하는 기분을 만들어 주는 면이 있습니다.
처음 잡는 사람을 위한 요령
일본 장기를 처음 본다면 말 이름을 외우기보다 움직임 몇 가지만 손에 익히는 편이 빠릅니다. 앞으로만 한 칸 가는 보병 계열, 비스듬히 멀리 가는 말, 십자로 멀리 가는 말, 이 세 부류만 구분해도 초반은 굴러갑니다.
초심자가 가장 자주 지는 이유는 잡힌 말이 다시 내 진영에 떨어지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말을 하나 내주는 순간 그 말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상대 손에 들어간 무기가 됩니다. 그래서 교환할 때마다 상대가 그 말을 어디에 쓸지 한 번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수비 진형을 갖추는 습관도 중요합니다. 왕 주위에 말 몇 개를 모아 두고 시작하는 정형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만 외워 두어도 무너지는 속도가 확연히 늦어집니다.
MSX와 판 위의 놀이
MSX는 여러 회사가 같은 규격으로 기계를 만들던 특이한 컴퓨터였습니다. 덕분에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쪽에서는 하나만 만들어도 여러 기종에서 돌릴 수 있었고,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이 쏟아졌습니다. 장기 같은 판 게임도 그중 한 갈래였습니다.
국내에서는 MSX가 대우 아이큐와 삼성 SPC 같은 이름으로 보급되면서 문방구와 가정에 꽤 들어왔지만, 이런 일본식 판 게임은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규칙이 낯설고 화면에 일본어가 나오는 데다, 애초에 아이들이 원한 것은 액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지금 해 보면 오히려 흥미롭습니다. 그 시절 MSX가 아이들 게임기만이 아니라 어른의 컴퓨터로도 팔리려 했다는 사실을, 이런 조용한 카트리지가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