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비아 마스터
트리비아 마스터 (Trivia Master SET 1) · 1985 · Enerdyne Technolog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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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도 주먹도 없는 오락실 기계
오락실 기계라고 하면 대개 쏘거나 때리거나 뛰는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화면에 문장 한 줄과 보기 네 개만 떠 있고, 할 일이라고는 정답을 고르는 것뿐인 기계도 있었습니다. 트리비아 마스터가 바로 그런 기계입니다. 반사신경도, 연습으로 늘어나는 조작도 필요 없습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만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기계는 1980년대 미국에서 하나의 큰 갈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락실보다는 술집이나 식당, 볼링장 한쪽에 놓여 있었고, 손님들이 술잔을 옆에 두고 몇 문제 풀다가 자리로 돌아가는 식으로 소비되었습니다. 액션 게임처럼 한 번에 오래 붙잡아 두는 대신, 짧게 여러 번 동전을 넣게 만드는 쪽으로 설계된 물건입니다.
어떤 게임인가
트리비아 마스터(Trivia Master)는 화면에 영어로 된 상식 문제가 나오고, 제시된 보기 가운데 하나를 골라 맞히면 점수를 얻는 퀴즈 게임입니다. 조작은 보기를 고르는 버튼이 전부이고, 제한 시간 안에 답을 정하지 못하면 그 문제는 넘어갑니다. 맞히면 다음 문제로 이어지고, 틀리면 기회가 줄어듭니다. 흐름이 이것뿐이라 규칙을 배우는 데는 십 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분야가 나뉘어 있습니다. 연예, 스포츠, 역사, 과학, 지리 같은 갈래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 분야의 문제를 받는 식입니다. 자신 있는 분야를 계속 고를 수도 있고, 골고루 돌아가며 풀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번갈아 문제를 받아 점수를 겨루는 방식도 준비되어 있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아는 것을 두고 다투는 구도가 만들어집니다.
문제집이 곧 상품이었습니다
이런 퀴즈 기계에는 액션 게임과 다른 사업 방식이 있었습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면 손님이 답을 외워 버리기 때문에, 기계 자체보다 문제를 계속 새로 공급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제조사는 문제 묶음을 갈아 끼울 수 있게 만들어 두고, 새 문제 세트를 따로 팔았습니다. 가게 주인 입장에서는 기계를 새로 들이지 않고도 손님에게 새 게임을 내놓을 수 있었던 셈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 기계의 수명은 부품이 아니라 문제의 신선도에 달려 있었습니다. 단골이 문제를 다 외우면 그 기계는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도 어느 시점의 문제 묶음이 담긴 한 판본이고, 같은 이름의 기계라도 안에 든 문제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시절의 상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게임을 지금 해 보면 난이도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문제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기준이 1980년대 중반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유행하던 텔레비전 드라마, 그때 활동하던 운동선수, 그때 개봉한 영화가 아무렇지 않게 문제로 나옵니다. 당시 그 나라 손님에게는 술자리에서 바로 답이 나올 상식이었겠지만, 시간과 장소가 다른 사람에게는 낯선 이름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기계는 게임이라기보다 그 시절 미국의 관심사를 기록해 둔 자료처럼 읽히는 면이 있습니다. 어떤 분야를 상식으로 여겼는지, 무엇을 누구나 안다고 전제했는지가 문제 목록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맞히지 못해도 문제를 읽는 것만으로 남는 게 있는 부류입니다.
국내에서는 거의 볼 수 없던 갈래
한국 오락실에는 이런 영어 퀴즈 기계가 사실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문제도 보기도 전부 영어이고, 그것도 현지 생활을 전제로 한 내용이라 화면을 읽는 것부터 벽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락실 손님의 대다수가 학생이던 환경에서 이런 기계를 놓는 것은 장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 퀴즈 장르가 자리를 잡은 것은 한참 뒤, 한글 문제를 쓰고 그림과 효과음을 화려하게 넣은 일본식 퀴즈 게임과 국산 퀴즈 기판이 나오면서였습니다. 그쪽은 정답을 고르는 것 말고도 볼거리가 많았고, 문제도 학생들이 아는 만화와 노래를 다뤘습니다. 같은 퀴즈라도 성격이 완전히 달랐던 셈입니다.
지금 해 본다면
기대할 것은 화면이나 조작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입니다. 시간제한이 넉넉하지 않으니 모르는 문제는 빨리 찍고 넘어가는 편이 낫고, 자신 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쪽을 계속 골라 점수를 쌓는 게 유리합니다. 두 사람이 번갈아 하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혼자 하면 그냥 문제집이지만, 옆에서 누가 맞히는지 지켜보는 순간 승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느리고 조용한 기계입니다. 화려한 기판들 사이에서 이런 물건이 왜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면, 한 번쯤 앉아서 몇 문제 풀어 볼 만합니다. 오락실이라는 공간이 반드시 액션 게임만으로 채워져 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 주는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