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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거

에거 (Eggor) · 1983 · Tel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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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맨 기판 위에 올라간 독수리

이 게임을 켜면 화면 구성과 색감, 미로의 생김새가 어딘가 익숙합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팩맨을 돌리던 그 기판 위에서 동작합니다. 1980년대 초반 아케이드 업계에서는 이미 널리 깔린 기판을 그대로 활용해 다른 게임을 얹는 일이 흔했고, 이 게임도 그 계보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용은 팩맨이 아닙니다. 점을 먹는 게임이 아니라 총을 쏘는 게임입니다. 미로 안을 돌아다니며 서로 쏘고 피하는, 팩맨과 갤러그를 반씩 섞은 듯한 물건입니다. 익숙한 하드웨어 위에서 낯선 규칙이 돌아가는 조합이 이 게임의 첫인상입니다.

에거 슈팅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83)

무엇을 하는 게임인가

에거(Eggor)는 아기 독수리를 조작해 미로를 돌아다니며 알을 쏘고, 자신을 쫓는 다섯 마리의 어른 독수리를 상대하는 미로 슈팅입니다. 조작은 4방향 조이스틱과 발사 버튼 하나가 전부입니다. 여덟 종류의 미로가 준비되어 있어, 한 단계를 넘기면 다음 미로로 넘어갑니다.

핵심은 쏘고 쏘이는 관계입니다. 이쪽이 어른 독수리를 맞히면 상대는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부화해 돌아옵니다. 완전히 없앨 수는 없고 시간을 벌 뿐입니다. 반대로 어른 독수리가 쏜 것에 이쪽이 맞으면 목숨이 하나 줄어듭니다. 이 게임이 팩맨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여기입니다. 팩맨에서 유령은 몸으로 부딪쳐야 위험하지만, 여기서는 통로 저쪽 끝에서도 죽습니다.

통로 하나가 곧 사선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전부는 통로 관리입니다. 4방향 미로에서 직선 통로에 들어서는 순간, 그 통로는 양쪽 모두에게 열린 사선이 됩니다. 긴 직선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반대편 끝에 어른 독수리가 있으면 이쪽이 먼저 쏘느냐 상대가 먼저 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살아남는 요령은 교차로를 끼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갈림길 근처에 자리를 잡으면 위험한 사선에서 한 칸만 비켜서도 몸을 숨길 수 있고, 상대가 사선에 들어오는 순간 먼저 쏘고 다시 빠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막다른 곳이나 긴 복도 한가운데에 갇히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다섯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계속 도망치면 추격자들이 자연스럽게 한 무리가 되어 따라붙고, 그 무리가 통로를 막으면 어느 방향으로도 나갈 수 없게 됩니다. 미로를 크게 한 바퀴 돌면서 추격자들의 간격을 벌려 놓는 편이 오래 버팁니다.

점수를 노리는 방식

이 게임의 점수 체계는 단계가 올라갈수록 같은 행동의 가치가 커지도록 짜여 있습니다. 알을 맞히는 것과 어른 독수리를 맞히는 것이 각각 다른 점수를 주고,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그 값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초반 단계에서 무리하게 점수를 긁어모으는 것보다, 안전하게 넘겨서 배점이 높아진 뒤에 승부를 보는 편이 유리합니다.

물론 뒤로 갈수록 추격자들의 압박이 거세지므로 무한정 버틸 수는 없습니다. 어디까지 안전을 챙기고 어디서부터 위험을 감수할지 저울질하는 것이 이 게임의 실질적인 재미입니다.

이름도 낯선 소규모 제작사의 물건

1983년은 아케이드 게임이 폭발적으로 쏟아지던 해였습니다. 대형 제작사의 히트작 뒤편에서 수많은 소규모 업체가 기존 기판을 활용해 자기 게임을 내놓았고, 그중 대부분은 몇 달 만에 잊혔습니다. 이 작품도 그런 흐름 속에 있습니다.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국내 오락실에서 이 기계를 봤다는 증언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시한 게임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규칙이 단순한 만큼 몇 판만 해 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바로 알 수 있고, 통로를 읽는 감각이 붙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오래 붙잡게 됩니다. 팩맨의 미로에 총을 얹으면 어떤 게임이 되는지 궁금했던 사람에게는 확인해 볼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그 시절 오락실 구석에서 조용히 사라진 게임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표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