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라비앙 대분전
천재 라비앙 대분전 (Tensai Rabbian Daifunsen) · 1986 · Toshiba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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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을 한 층씩 밀어 내리는 아르바이트
이 게임의 규칙은 딱 한 줄로 설명됩니다. 화물 여섯 개를 맨 아래까지 내려 화물선에 실으면 끝입니다. 그런데 라비앙이 화물에 한 번 닿을 때마다 화물은 딱 한 층만 내려갑니다. 여섯 개를 여러 층 아래까지 내리려면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같은 작업을 수십 번 반복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주 괴물들이 계속 쫓아옵니다. 그러니 이 게임은 단순 반복 노동이 아니라, 쫓기면서 어느 화물을 지금 건드릴지 계속 판단해야 하는 게임이 됩니다. 화물 하나를 붙잡고 끝까지 내리려다가는 반드시 잡힙니다.
어떤 게임인가
천재 라비앙 대분전(Tensai Rabbian Daifunsen)은 층과 사다리로 이루어진 한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퍼즐 액션입니다. 주인공은 지구에 불시착한 토끼처럼 생긴 외계인 라비앙입니다. 니모라는 소녀가 그를 구해 주었고, 라비앙은 그 은혜를 갚을 선물을 사려고 아르바이트에 나섭니다. 그 아르바이트가 바로 화물을 배에 싣는 일입니다.
조작은 좌우 이동과 사다리 오르내리기가 전부입니다. 공격 수단은 없습니다. 쫓아오는 괴물을 없앨 방법이 없으니, 오로지 동선과 위치로만 상황을 풀어야 합니다.
적을 다루는 것이 실력이다
이 게임의 진짜 깊이는 도망이 아니라 유도에 있습니다. 괴물들은 라비앙을 쫓아오기 때문에, 반대로 라비앙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괴물이 어디에 모일지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하는 사람은 먼저 괴물을 화면 한쪽 끝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 다음 사다리를 타고 반대편으로 크게 빠져나가 비어 있는 구역에서 화물 몇 개를 연달아 내립니다. 괴물이 다시 몰려오면 또 다른 쪽으로 끌고 갑니다. 이 유인과 작업의 반복이 게임의 기본 리듬입니다.
반대로 초보자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눈앞의 화물만 보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화물을 건드리려면 그 옆에 서야 하는데, 그 자리가 사다리에서 멀면 괴물이 다가올 때 도망칠 길이 없습니다. 화물을 건드리기 전에 빠져나갈 사다리를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여섯 개를 어떤 순서로 내릴까
화물 여섯 개를 어떤 순서로 처리할지가 이 게임의 전략입니다. 하나씩 완전히 내리는 방식은 이동 거리가 짧아 보이지만,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게 되어 위험합니다.
한 층씩 골고루 내리는 방식은 이동이 많지만 몸이 계속 움직이니 잡히기 어렵습니다. 이동 경로 위에 놓인 화물을 지나가면서 툭툭 건드리는 식으로 하면 걸음과 작업이 겹쳐 효율이 좋아집니다.
아래층에 화물이 쌓이기 시작하면 상황이 또 달라집니다. 남은 것이 적어질수록 이동 거리가 길어지므로, 마지막 한두 개를 어디에 남겨 둘지는 미리 정해 두는 편이 좋습니다. 가장 아래 사다리 근처에 남겨 두면 마무리가 훨씬 편합니다.
카세트테이프에서 카트리지로
라비앙이라는 캐릭터는 이 게임에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앞서 카세트테이프로 나온 작품에 이미 등장했습니다. 소프트 프로라는 작은 개발사가 만든 캐릭터였고, 그때는 훨씬 소박한 형태였습니다.
이후 도시바 EMI가 이 개발사에 게임을 의뢰하면서, 기존 테이프 작품을 다듬고 요소를 추가해 카트리지로 다시 낸 것이 이 작품입니다. 테이프에서 카트리지로 넘어간다는 것은 불러오는 시간이 사라지고 용량이 늘어난다는 뜻이라, 같은 아이디어라도 훨씬 다듬어진 형태로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절 일본에서는 음반 회사들이 게임 유통에 뛰어드는 일이 흔했습니다. 도시바 EMI도 그중 하나였고, 이미 갖춘 유통망을 활용해 소프트웨어를 매장에 깔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개발사가 만들고 큰 회사가 파는 구조는 이 시기 MSX 소프트웨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단순한 게임이 오래가는 이유
이 게임은 화면 하나에서 끝나고, 규칙도 한 줄이며, 공격도 없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놀라울 만큼 소박합니다. 그런데도 몇 판을 계속하게 되는 것은, 매번 괴물이 움직이는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같은 화면이 매번 다른 문제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조는 8비트 시절 퍼즐 액션의 공통된 미덕입니다. 용량이 없으니 내용을 늘릴 수 없고, 대신 규칙 몇 개를 서로 얽히게 만들어 깊이를 냈습니다. 이 게임은 화물이 한 층씩만 내려간다는 제약 하나로 그 깊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어 제목에 일본 내수 유통이었으니 국내 문방구에 들어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만 규칙이 언어와 무관하게 눈으로 파악되는 종류라, 지금 처음 보는 사람도 한 판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