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커드 플래그
체커드 플래그 (Chequered Flag Japan) · 1988 · Ko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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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선의 깃발 하나로 이름을 삼았습니다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자가 결승선을 통과할 때 흔드는 것이 흑백 체크무늬 깃발입니다. 이 게임의 제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레이싱 게임에 붙일 수 있는 가장 직설적인 이름인 셈인데, 게임 내용도 딱 그만큼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앞차를 제치고, 시간 안에 구간을 통과하고, 마지막에 그 깃발을 보는 것. 할 일은 그게 전부입니다.
1988년의 오락실은 레이싱 기계가 가장 화려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앉아서 하는 좌석형 기계가 늘어나고, 화면 속 도로가 좌우로 휘면서 몸이 따라 기우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 내던 때입니다. 이 게임도 그 흐름 위에 있습니다.
뒤에서 시작해 앞으로 밀고 나갑니다
체커드 플래그(Chequered Flag)는 코나미가 만든 오락실 레이싱 게임입니다. 시작하면 대개 뒤쪽 순위에서 출발합니다. 앞에는 추월해야 할 차들이 줄지어 있고, 화면 위쪽에는 남은 시간이 줄어듭니다. 다음 구간 관문에 도착하기 전에 시간이 바닥나면 그 자리에서 판이 끝납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목표는 두 겹입니다. 순위를 올리는 것과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이 둘은 대체로 같은 방향이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리하게 추월하다 부딪히면 속도가 확 죽고, 그 한 번의 손실이 다음 관문을 못 넘기는 원인이 됩니다. 안전하게 뒤따라가다 직선 구간에서 한꺼번에 제치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기어 선택이 승부를 가릅니다
이 시절 오락실 레이싱 기계는 대부분 기어를 둘로 나눠 줬습니다. 저단과 고단, 그 둘뿐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선택이 기록을 크게 갈라 놓습니다. 직선에서는 당연히 고단이 빠르지만, 코너 진입 전에 저단으로 내려 두지 않으면 바깥으로 밀려 벽이나 잔디로 나갑니다.
초보와 숙련자의 차이는 거의 여기서 납니다. 초보는 고단에 놓고 끝까지 버티다 코너마다 미끄러지고, 익숙한 사람은 코너 직전에 잠깐 내렸다가 탈출하면서 바로 올립니다. 이 리듬을 몸에 익히면 같은 코스에서 기록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부딪히지 않는 것도 실은 기어 관리의 문제입니다. 속도가 붙은 상태에서는 차선 변경 자체가 잘 안 먹히니, 추월할 자리를 미리 정해 두고 그 앞에서 속도를 다듬어야 합니다.
코스를 외우는 게 실력입니다
오락실 레이싱 게임에서 실력이란 결국 코스를 외운 정도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길이 왼쪽으로 크게 휘는지, 어디에 오르막이 있어 화면 너머가 안 보이는지를 알고 있으면 훨씬 과감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처음 달릴 때는 앞이 안 보여 겁이 나지만, 세 번째 네 번째쯤 되면 눈보다 손이 먼저 움직입니다.
특히 시야가 막히는 구간이 위험합니다. 오르막 너머나 급한 커브 안쪽에 느린 차가 서 있으면 보고 나서 피하기에는 늦습니다. 이런 자리는 미리 바깥 차선으로 빠져 있는 것이 정답입니다. 한 번 크게 당해 본 자리는 다음부터 절대 잊히지 않으니, 초반의 실패가 곧 공부가 됩니다.
코나미가 잘하던 것이 보입니다
코나미는 이 시기에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기판을 쏟아 내던 회사였습니다. 액션도 슈팅도 스포츠도 모두 만들었고, 어느 쪽이든 화면을 시원하게 뽑아내는 데 강했습니다. 이 레이싱 게임에서도 도로가 흘러가는 속도감과 배경이 지나가는 처리가 눈에 띕니다.
음악도 코나미다운 구석이 있습니다. 경쾌하고 반복이 분명한 곡을 깔아 놓아 속도가 붙을수록 잘 어울립니다. 시간에 쫓기며 관문을 향해 달릴 때 이 배경음이 긴장을 밀어 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국내 오락실에서는 같은 시기의 다른 유명 레이싱 기계들에 가려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놓여 있던 곳에서는 짧고 굵게 즐기기 좋은 물건이었습니다. 한 판이 길지 않으니 친구와 번갈아 붙어 기록을 겨루기에 알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