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코쿠올로지
퀴즈 코쿠올로지 (Quiz Kokology) · 1992 · Tec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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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고 지는 게 없는 오락실 기계
오락실 기계는 거의 예외 없이 실력을 겨루는 도구였습니다.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남기는지가 화면에 찍혔고, 그 숫자를 보려고 사람들이 동전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1992년 테크모가 내놓은 이 기판은 그 구조에서 한 발 비켜서 있습니다.
소재가 된 코쿠올로지는 당시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던 심리 테스트 놀이입니다. 어떤 상황을 던지고 몇 가지 답 중 하나를 고르게 한 다음, 그 선택이 사실은 당신의 무엇을 뜻한다고 풀어주는 방식입니다. 맞고 틀림이 없고, 고른 답이 곧 나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퀴즈 코쿠올로지(Quiz Kokology)는 그 놀이를 그대로 오락실 화면에 옮긴 물건입니다.
무엇을 하는 게임인가
겉모습은 여느 퀴즈 기판과 다르지 않습니다. 화면에 질문과 선택지가 뜨고 제한 시간 안에 하나를 고릅니다. 다른 점은 답을 고른 뒤입니다. 정답 여부를 알려주는 대신, 그 선택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주는 글이 돌아옵니다. 이 게임의 볼거리는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풀이 쪽에 있습니다.
다만 오락실 기판인 이상 게임으로 굴러갈 장치는 따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순수한 심리 테스트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점수를 매기고 진행을 가르는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상식 문제 성격의 질문이 끼어들거나,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답했을지를 짐작하게 만들어 승부를 만드는 식의 구성이 이 계열에서 흔히 쓰였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헤매는 지점은 대개 하나입니다. 정답을 찾으려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시간을 다 써버리는 것입니다. 이 게임에서 오래 고민하는 것은 별 이득이 없습니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손이 가는 쪽을 고르는 편이 게임 흐름에도 맞고 소재의 취지에도 맞습니다.
혼자보다 둘일 때 살아나는 물건
이 기판은 혼자 앉았을 때보다 둘이 붙었을 때 확실히 재미있어집니다. 심리 테스트라는 것 자체가 원래 혼자 하는 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옆 사람이 무엇을 골랐는지 보고, 화면이 그것을 어떻게 풀어주는지 함께 읽고, 맞다 아니다 하며 떠드는 데서 재미가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게임은 실력을 겨루는 도구가 아니라 대화를 만들어내는 도구에 가깝습니다. 격투 게임 앞에 서지 않던 손님들도 이런 기계 앞에는 앉았고, 그래서 기존 손님층과 겹치지 않는 자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테크모가 이듬해 속편까지 내놓은 것을 보면 그 계산이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졌던 모양입니다.
일본어로만 성립하는 게임
국내에서 이 게임을 만나기 어려웠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질문도 선택지도 풀이도 전부 일본어 문장이고, 그것도 단어 몇 개가 아니라 읽어내려가야 하는 긴 글입니다. 재미의 핵심인 풀이 부분이 통째로 글이라, 읽지 못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액션이나 슈팅은 글자를 몰라도 손이 알아서 하지만 이 게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내 오락실 업주에게 이런 기판은 들여놓을 이유가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대전 격투와 벨트 스크롤 액션이 자리를 다투던 90년대 초 한국 오락실에서 일본어 심리 테스트 기계가 버틸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브라우저에서 켜면 조건이 달라집니다. 동전을 아낄 필요도,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 눈치를 볼 일도 없으니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이 게임을 볼 수 있는 셈입니다.
테크모와 퀴즈 기판의 짧은 시대
테크모는 닌자용검전과 캡틴 츠바사 같은 이름으로 기억되는 회사입니다. 액션 게임을 아주 단단하게 만들던 곳이었고 스포츠 게임에서도 오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런 회사가 심리 테스트 기판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90년대 초 일본 오락실 시장의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퀴즈 기판은 제작사에게 부담이 적은 상품이었습니다. 복잡한 연산이나 화려한 기술이 필요 없고, 대부분의 품이 글을 쓰고 다듬는 데 들어갑니다. 큰 작품을 만드는 사이사이 라인업을 채우기에 알맞았습니다.
그러나 이 장르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질문을 한 번 다 본 손님에게 다시 넣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중반부터 퀴즈 기판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 게임은 그 짧았던 시절이 남긴 표본이고, 지금 보면 오히려 그 특이함 덕분에 더 눈길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