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인스팅트
킬러 인스팅트 (Killer Instinct) · 1994 · R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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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보가 끝나지 않는 격투 게임
체력이 반쯤 깎였을 때 상대의 한 방이 들어가면 화면 구석에 숫자가 붙기 시작합니다. 7 HIT, 12 HIT, 숫자가 멈추지 않고 올라가는 동안 아나운서는 점점 흥분하고, 마지막에 울트라 콤보가 터지면 서른 대가 넘는 연속기가 한 화면에 그대로 이어집니다. 처음 본 사람은 저게 대체 어떻게 막히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킬러 인스팅트(Killer Instinct)는 울트라테크라는 거대 기업이 주최하는 살인 토너먼트를 배경으로 한 1대1 대전 격투 게임입니다. 실사에 가까운 질감의 캐릭터가 어두운 무대 위에서 부딪히고, 한 번 잡히면 길게 이어지는 콤보가 이 게임의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오프너에서 엔더까지
이 게임의 콤보는 아무렇게나 이어지는 게 아니라 정해진 문법이 있습니다. 콤보를 시작하는 오프너가 들어가면, 약한 공격과 강한 공격을 잇는 링커와 자동으로 두 번 들어가는 오토 더블을 번갈아 쌓고, 마지막에 엔더로 끊어 마무리합니다. 게이지가 차 있으면 그대로 울트라 콤보로 넘어가 화면 가득 히트 수를 채웁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콤보를 외운 만큼 강해집니다. 어떤 오프너 뒤에 어떤 링커가 붙는지, 어디서 엔더로 끊어야 손해를 안 보는지가 캐릭터마다 다르고, 손에 익으면 한 번의 실수로 상대 체력의 절반을 가져갑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고 잡으면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두세 대에서 끊깁니다.

맞는 쪽에게 준 탈출구
그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한다면 게임이 성립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들어간 것이 콤보 브레이커입니다. 상대가 지금 어떤 계열의 공격으로 콤보를 잇고 있는지 읽고 정확한 타이밍에 커맨드를 넣으면 연속기가 그 자리에서 끊기고, 아나운서가 목이 터져라 콤보 브레이커를 외칩니다.
이 개념은 이후 수많은 격투 게임에 이런저런 형태로 옮겨 갔습니다. 맞는 동안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것, 때리는 쪽도 끊길 위험을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 대전의 밀도를 크게 바꿔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대전은 콤보를 넣으려는 쪽과 끊으려는 쪽의 눈치 싸움에 가깝습니다.

라운드 대신 두 개의 체력 게이지
승부 방식도 조금 다릅니다. 라운드를 나누는 대신 체력 게이지를 두 줄 주고, 첫 줄이 비면 그 자리에서 두 번째 줄로 이어 싸웁니다. 게임이 끊기지 않으니 몰아치는 흐름이 그대로 유지되고, 한쪽이 콤보를 잘 넣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끝나 버립니다.
무대에 따라서는 상대를 가장자리로 밀어붙여 아래층으로 떨어뜨릴 수 있고, 그러면 배경이 바뀌면서 싸움이 이어집니다. 승부가 결정된 뒤에 넣는 마무리 연출도 따로 준비되어 있어서, 이겨 놓고도 커맨드를 시험하려고 계속 붙어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계열이 제각각인 얼굴들
캐릭터 면면도 기억에 남습니다. 주인공 격인 수도승 제이고, 늑대인간 사브레울프, 얼음으로 이루어진 외계인 글레이셔스, 해골 검사 스파이널, 불꽃 그 자체인 신더, 공룡과 사람을 섞어 놓은 리퍼, 도끼를 든 치프 썬더, 그리고 울트라테크가 만들어 낸 전투 로봇 풀고어까지 출신이 전부 다릅니다.
이 캐릭터들은 3차원으로 만든 모델을 미리 렌더링해 2차원 스프라이트로 굽는 방식으로 그려졌습니다. 금속과 뼈, 얼음의 질감이 도트 그림보다 훨씬 무겁게 표현되어서, 당시 기준으로는 화면에서 눈을 떼기 어려운 그림이었습니다. 배경을 채운 어둠과 조명도 그 인상을 거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