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그 패미컴
트로그 (Trog Europe) · 1991 · Accla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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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로 빚은 공룡들이 뒤뚱거리는 화면
처음 이 게임 화면을 보면 그림체부터 눈에 들어옵니다. 도트로 그린 캐릭터인데도 표면에 손자국이 남은 것 같은 뭉툭한 질감이 있고, 움직임은 미끄러지듯 부드럽기보다 뒤뚱뒤뚱 흔들립니다. 실제로 이 게임의 캐릭터들은 점토 인형을 만들어 한 컷씩 찍는 클레이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그려졌고, 그걸 그대로 도트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90년대 초 오락실과 가정용 게임기에서 흔히 보던 매끈한 만화풍 캐릭터들 사이에서 이 게임의 두툼한 공룡들은 확실히 이질적이었습니다.
주인공은 트로그라는 이름의 원시인입니다. 정확히는 원시인 쪽이 여럿이고, 이들을 쫓아다니는 공룡들이 화면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화면 아래쪽에 표시되는 얼굴 아이콘이 험상궂게 웃고 있는데, 그 표정만 봐도 이 게임이 진지한 선사시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는 게 전해집니다.
알을 다 줍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습니다
트로그(Trog)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의 미로에서 알을 모으는 액션 퍼즐입니다. 한 판은 벽으로 구획된 작은 미로 하나고, 그 안에 알이 여러 개 흩어져 있습니다. 원시인을 조종해 알을 전부 주우면 그 판이 끝나고 다음 미로로 넘어갑니다. 규칙은 이렇게 한 줄로 끝나지만, 미로 안에 공룡이 같이 돌아다닌다는 점이 전부를 바꿉니다.
공룡에게 닿으면 잡아먹힙니다. 그래서 알을 줍는 동선은 언제나 공룡의 이동 경로를 계산한 결과여야 합니다. 통로가 좁은 구간에서 공룡과 마주 보게 되면 되돌아 나갈 수밖에 없고, 그러는 사이 다른 방향에서 또 한 마리가 올라옵니다. 팩맨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감각은 팩맨보다 훨씬 넓고 어수선합니다. 점 하나하나를 훑는 게 아니라 흩어진 목표물 몇 개를 골라 주워야 하니 경로를 미리 짜는 머리싸움이 큽니다.
아이템 하나로 상황이 뒤집힙니다
미로 곳곳에는 도구가 놓여 있습니다. 그중 가장 통쾌한 것은 원시인을 잠시 공룡으로 바꿔 주는 변신입니다. 이걸 먹으면 쫓기던 쪽이 쫓는 쪽이 되어, 방금까지 나를 몰아붙이던 공룡들을 거꾸로 밟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이 길지 않아서, 변신 직전에 어느 방향으로 달려갈지 정해 두는 게 좋습니다.
바퀴 달린 탈것이나 속도를 올려 주는 도구도 있습니다. 빨라지면 편할 것 같지만 미로에서는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모퉁이를 돌 때 관성이 붙어 원하는 통로를 지나쳐 버리고, 그 한 칸이 그대로 잡아먹히는 결과가 됩니다. 익숙해지기 전에는 속도 도구를 일부러 피해 다니는 것도 방법입니다.
혼자보다 둘이 재미있는 게임
이 게임은 원래 두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두 원시인이 같은 미로에 들어가 알을 나눠 줍는데, 협력과 경쟁이 묘하게 섞입니다. 공룡을 한쪽이 끌어 주면 다른 쪽이 편하게 알을 쓸어 담을 수 있으니 협력이 이득인데, 점수는 각자 쌓이니 좋은 자리는 서로 먼저 가려고 합니다. 옆 사람이 공룡을 몰고 내 쪽으로 달려오는 순간의 배신감이 이 게임의 백미입니다.
혼자 할 때는 판마다 동선을 외우는 쪽으로 방향이 잡힙니다. 알 위치와 공룡이 튀어나오는 지점은 판마다 고정되어 있으니, 몇 번 죽어 보고 나면 안전한 순서가 보입니다. 처음 보는 미로에서 무작정 가까운 알부터 집으려 하면 대개 가운데에서 포위당하므로, 가장자리부터 훑고 중앙을 마지막에 처리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 미로
초반 몇 판은 통로가 넓어 공룡을 피해 돌아갈 여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판이 넘어갈수록 미로 구조가 촘촘해지고 공룡 수가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도망갈 갈래길이 사라지면 아이템에 기대는 비중이 커지는데, 아이템 위치까지 공룡이 지키고 서 있는 배치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진짜입니다.
난이도가 튀는 지점은 대개 알 하나가 막다른 골목 안쪽에 놓인 구성입니다. 들어가면 나올 길이 하나뿐이라, 공룡이 입구를 막는 순간 끝입니다. 이런 자리는 공룡이 반대편으로 충분히 멀어졌을 때 한 번에 들어갔다 나오는 식으로 처리해야 하고, 욕심을 내서 두 개를 한 번에 챙기려 들면 거의 실패합니다. 이 게임이 짧은 판 구성에도 오래 붙잡고 있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실수의 원인이 늘 명확해서, 한 판만 더 해 보자는 마음이 잘 끊기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