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오 레퓨스
라비오 레퓨스 (Rabio Lepus Japan) · 1987 · V-System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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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가 아니라 토끼입니다
횡스크롤 슈팅의 주인공은 거의 예외 없이 전투기입니다. 날렵한 기수, 뒤로 뻗은 날개, 엔진 불꽃. 그런데 이 게임에서 화면 왼쪽에 떠 있는 것은 귀가 긴 토끼 모양 로봇입니다. 둥근 몸통에 커다란 귀가 달려 있고, 팔이 앞으로 뻗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화면을 흘깃 보고 슈팅 게임인 줄 알아채기까지 몇 초가 걸립니다.
제목도 그 노선을 따릅니다. 레퓨스는 라틴어로 토끼를 뜻하는 말이고, 천문학에서는 오리온자리 아래에 있는 토끼자리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앞에 붙은 라비오와 합치면 토끼를 두 번 강조한 셈입니다. 1987년이면 슈팅 게임이 진지한 우주 전쟁 쪽으로 몰려가던 무렵인데, 그 흐름을 정면으로 비껴간 물건이었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라비오 레퓨스(Rabio Lepus)는 브이시스템이 1987년에 내놓은 횡스크롤 슈팅 게임입니다. 화면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고, 그 위를 토끼 로봇으로 날며 앞에서 나타나는 적을 처리하는 것이 기본 얼개입니다. 2인 동시 플레이를 지원해서 옆자리와 함께 붙을 수 있었습니다.
귀엽게 생겼다고 만만한 게임은 아닙니다. 이 시절 횡스크롤 슈팅의 통상적인 밀도를 그대로 갖추고 있어서, 화면 앞뒤로 적이 쏟아지고 지형이 길을 좁힙니다. 겉모습과 실제 난도의 차이가 이 게임의 인상을 결정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만화 같은 화면에 앉았다가 예상보다 빨리 잔기를 잃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횡스크롤 슈팅에서 살아남는 법
횡스크롤 슈팅의 첫 번째 원칙은 자리 잡기입니다. 화면 왼쪽 끝에 바짝 붙으면 뒤에서 오는 적에 대응할 수 없고, 오른쪽으로 너무 나가면 새로 나타나는 적을 볼 시간이 사라집니다. 화면 왼쪽에서 3분의 1쯤 되는 자리를 기본 위치로 삼는 것이 정석입니다. 앞을 볼 여유가 생기면서 뒤로 물러설 공간도 남습니다.
두 번째는 위아래 축을 쓰는 일입니다. 초보는 좌우로만 움직이려 합니다. 그런데 이 장르에서 적탄을 피하는 주된 방법은 위아래로 비켜서는 것입니다. 탄이 오면 물러서지 말고 위나 아래로 한 뼘 옮기는 습관을 들이면, 화면 오른쪽 끝으로 몰려 갇히는 일이 크게 줄어듭니다.
세 번째는 지형입니다. 이 계열 게임에서 진짜 위험한 것은 적탄이 아니라 벽입니다. 적에 정신이 팔린 사이 통로가 좁아지고, 그대로 천장이나 바닥에 부딪힙니다. 좁은 구간에 들어갈 때는 쏘는 것을 잠시 접어 두고 통로 한가운데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앞이 좁아지는 낌새가 보이면 미리 중앙 높이로 옮겨 두는 것이 요령입니다.
브이시스템과 그 시절
브이시스템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한 일본 아케이드 제작사입니다. 크게 이름이 알려진 회사는 아니지만 슈팅과 대전물 쪽에 꾸준히 물건을 냈고, 뒷날 축구 게임 계열로도 알려졌습니다. 이 게임은 그 회사의 초기 작품에 해당합니다.
1987년의 횡스크롤 슈팅 시장은 대단히 붐볐습니다. 이미 자리 잡은 시리즈들이 매년 새 작품을 내놓았고, 그 사이에서 신생 회사가 눈에 띄려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했습니다. 전투기 대신 토끼 로봇을 세운 것은 그런 상황에서 나온 선택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 게임은 슈팅 자체의 완성도보다 화면의 별남으로 기억되는 쪽입니다.
이런 시도가 아주 예외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동물이나 만화풍 캐릭터를 앞세운 슈팅이 몇 편 나왔고, 그중 일부는 꽤 사랑받았습니다. 슈팅이라는 형식이 충분히 익숙해지자, 껍데기를 바꿔서 새 손님을 끌어 보려는 흐름이 생긴 셈입니다.
국내에서와 지금
국내 오락실에서 이 게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같은 시기 훨씬 유명한 횡스크롤 슈팅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런 물건은 여러 기판이 섞인 통에 잠깐 걸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따로 부르던 별명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켜 보면 제일 먼저 웃게 되는 것이 역시 화면입니다. 토끼가 우주를 날며 적과 싸우는 광경은 몇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낯설고 재미있습니다. 그러다 몇 판 죽고 나면 이 게임이 겉모습과 달리 제법 단단한 슈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짧게 붙잡아 보기에 좋은, 별난 구석이 있는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