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런 (PC엔진)
아웃런 (Out Run Japan) · 1990 · NEC Ave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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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고르고 출발한다
시동을 걸기 전에 화면에 카세트가 뜹니다. 세 곡 중 하나를 골라 라디오를 켜는 연출인데, 이 짧은 순간이 이 게임의 성격을 다 말해 줍니다. 순위도 경쟁 상대도 없습니다. 옆자리에 사람을 태우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그 기분을 위한 게임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에는 다른 경주차가 없습니다. 도로를 채우는 건 그냥 일반 차량들이고, 상대해야 할 것은 시간뿐입니다. 체크포인트를 지날 때마다 남은 시간이 조금씩 더해지고, 그게 다하면 거기서 끝납니다.
어떤 게임인가
아웃런(Out Run)은 오픈카를 몰고 정해진 구간을 시간 안에 통과하는 드라이브 레이싱 게임입니다. 오락실에서 몸이 움직이는 큰 캐비닛으로 유명했던 작품을 PC엔진으로 옮긴 판본입니다.
한 판의 흐름은 단순합니다. 출발하면 도로가 이어지고, 일정 거리마다 갈림길이 나옵니다.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고르면 다음 구간의 풍경이 달라집니다. 이 선택을 다섯 번 하고 나면 결승점에 닿는데, 갈림길 조합에 따라 도착하는 끝이 여러 개입니다.
조작은 가속과 브레이크, 조향, 그리고 기어 두 단이 전부입니다. 고속 기어로 달리다 코너 직전에 저속으로 내리고, 미끄러지듯 돌아 나온 다음 다시 올리는 리듬이 이 게임의 기본입니다.
갈림길과 풍경
이 게임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갈림길입니다. 야자수가 늘어선 해안, 돌담이 이어지는 시골길, 사막, 폐허 같은 유적지까지 구간마다 배경이 완전히 다릅니다. 한 번 달려서는 그중 다섯 구간만 보게 되므로, 다른 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다시 잡게 됩니다.
대체로 왼쪽 길이 쉽고 오른쪽 길이 어렵게 짜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쉬운 쪽으로만 가서 끝까지 도달하는 감각을 익히고, 익숙해지면 어려운 길로 들어가 보는 게 좋습니다.
시간과 싸우는 법
제한 시간이 빡빡해서 여유롭게 달릴 수가 없습니다. 코너에서 속도를 얼마나 덜 죽이느냐가 전부입니다. 브레이크를 세게 밟으면 안전하지만 시간이 모자라고, 안 밟으면 도로 밖으로 나갑니다.
요령은 코너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안쪽으로 붙어 두는 것입니다. 코너 한가운데에서 핸들을 크게 꺾으면 이미 늦습니다. 화면 위쪽에 다음 코너 방향을 알려 주는 표지가 나오니, 그것을 보고 미리 자리를 잡는 습관을 들이면 시간이 확 줄어듭니다.
일반 차량과의 접촉도 시간 손실이 큽니다. 부딪히면 차가 공중으로 날아가고 다시 출발할 때까지 몇 초가 사라집니다. 특히 뒤에서 빠르게 따라붙어 추월할 때 앞차가 차선을 바꾸는 경우가 잦으니, 여유 있게 벌려 지나가는 편이 결과적으로 빠릅니다.
이식판의 사정
원작은 확대 축소를 자유롭게 쓰는 전용 기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도로 옆의 나무와 표지판이 멀리서부터 커지며 다가오는 그 표현이 당시로서는 굉장한 것이었고, 가정용 기기로 옮기기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PC엔진판은 배경의 밀도와 그려지는 양을 조절해 그 속도감을 최대한 남기는 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락실 화면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라디오 선택과 갈림길, 여러 개의 결말 같은 이 게임의 뼈대는 그대로 있습니다.
오락실의 기억
국내 오락실에도 이 게임이 놓여 있었고, 특히 몸이 좌우로 기우는 큰 캐비닛은 그 앞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눈이 갔습니다. 자리에 앉아 핸들을 잡으면 그것만으로 이미 다른 게임과 달랐습니다.
순위를 다투는 레이싱 게임들이 쏟아지던 시기에, 이 게임은 이기는 것보다 달리는 기분을 앞세웠습니다. 지금 다시 잡아 봐도 그 방향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시간을 재며 달리다 보면 어느새 배경을 구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게임입니다.
같이 온 사람이 옆에서 갈림길을 골라 주는 것도 이 게임을 하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갈림길이 다가올 때마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로 잠깐 실랑이가 벌어지고, 고른 뒤에 나타나는 풍경을 함께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