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이드
에스프레이드 (Esp Ra de a D 2018 Tokyo International Ver 980422) · 1998 · C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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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가 아니라 사람이 날아다닙니다
슈팅 게임 화면에 처음 들어서면 대개 전투기나 우주선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교복 차림의 아이가 화면 아래쪽에 떠 있습니다. 배경도 우주나 외계 요새가 아니라 지하철역, 고가도로, 유리로 된 빌딩 숲 같은 익숙한 도시 풍경입니다. 그 익숙한 거리 위로 헬기와 장갑차가 몰려오고, 아이는 손끝에서 뻗어 나가는 빛으로 그것들을 지웁니다. 슈팅 게임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 배치가 첫인상을 강하게 남깁니다.
기체가 사람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겉모습 차이로 끝나지 않습니다. 화면에 그려지는 캐릭터가 작고 날렵해서, 탄이 빽빽하게 깔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때의 감각이 커다란 전투기를 몰 때와 다릅니다. 눈으로 보이는 몸집과 실제로 판정되는 점의 크기 차이가 이 게임을 이해하는 첫 관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게임인가
에스프레이드(ESP Ra.De.)는 화면이 아래에서 위로 흘러가는 종스크롤 슈팅입니다. 플레이어는 초능력을 지닌 인물 한 명을 골라 화면 아래에서 위로 밀고 올라가면서, 쏟아지는 적과 그들이 뿌리는 탄 사이를 피해 나가고 구간 끝에 버티고 선 큰 적을 쓰러뜨립니다. 조작은 8방향 레버와 버튼 몇 개뿐이라 규칙 자체는 몇 초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격은 두 갈래입니다. 버튼을 짧게 끊어 누르면 앞쪽으로 넓게 퍼지는 화력이 나가고 몸이 빠르게 움직입니다. 반대로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으면 집중된 굵은 공격이 나가는 대신 이동 속도가 크게 떨어집니다. 이 느린 상태가 아주 중요합니다. 탄 사이의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을 때는 빠른 이동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위험 구간에서는 일부러 속도를 죽이고 한 칸씩 조심스럽게 옮겨야 합니다.
여기에 이 게임 고유의 장치가 하나 더 붙습니다. 적에게 특수한 기운을 걸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는 방식이 있어서, 여러 적을 묶어 놓고 동시에 폭발시키면 점수가 크게 불어납니다. 그저 앞의 적을 지우며 나아가는 것과, 일부러 참았다가 한 번에 정리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막히는 곳과 넘기는 요령
처음 붙잡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눈에 보이는 캐릭터 전체를 피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 장르에서 실제로 탄에 맞는 부분은 캐릭터 한가운데의 아주 작은 점 하나뿐입니다. 옷자락이나 팔이 탄을 스치고 지나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필요 이상으로 크게 피하다가 화면 구석에 몰려 빠져나갈 길을 잃습니다. 눈으로 캐릭터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중심점만 보고 움직이는 습관이 붙어야 앞으로 나아갑니다.
두 번째 고비는 탄을 피하는 데만 정신이 팔리는 순간입니다. 적이 살아 있는 한 탄은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회피만 반복하면 결국 화면이 메워집니다. 탄을 뿌리는 적을 먼저 지우는 것이 사실은 가장 확실한 회피입니다. 어느 적을 먼저 잡아야 화면이 편해지는지를 몇 판 만에 몸으로 익히게 됩니다.
세 번째는 봄을 아끼는 버릇입니다. 폭탄은 위기를 벗어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죽지 않고 구간을 통과하는 열쇠입니다. 아깝다고 들고 다니다가 그대로 죽으면 그 폭탄은 아무 값도 하지 못합니다. 처음 몇 판은 위험하다 싶으면 주저 없이 쓰는 편이 훨씬 멀리 갑니다.
도시라는 배경이 만든 차이
같은 시기의 종스크롤 슈팅 대부분은 우주 공간이나 미래의 요새를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스테이지 사이의 구분이 색과 적기 모양 정도로만 나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게임은 현대 도시를 무대로 잡았기 때문에 구간마다 풍경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지하 통로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오고, 고층 건물 사이를 헤치고, 다시 시설 안쪽으로 들어가는 흐름이 눈에 그대로 보입니다.
배경이 현실적이라는 점은 난이도 체감에도 영향을 줍니다. 배경 그림이 복잡하면 탄이 묻혀서 잘 안 보일 위험이 있는데, 이 게임은 적탄을 눈에 잘 띄는 색과 형태로 그려 배경과 확실히 구분했습니다. 화면 정보량이 많은 탄막 슈팅에서 이것은 사소해 보여도 결정적인 설계입니다.
만든 곳과 그 시절
이 게임을 만든 회사는 화면을 뒤덮는 탄의 양을 늘리는 대신, 탄 속도를 낮추고 피격 판정을 극단적으로 줄여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피할 수 있는' 상태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슈팅 장르를 다시 정의한 곳입니다. 다른 회사들이 슈팅에서 손을 떼던 시기에도 이곳만은 계속 종스크롤 슈팅을 내놓았고, 그 결과 이 장르의 문법을 사실상 혼자 이어 갔습니다.
이 작품은 그 회사 초기 작품군 가운데 결이 조금 다른 자리에 있습니다. 같은 회사의 다른 대표작들이 기계와 곤충을 앞세운 데 반해, 이쪽은 사람과 도시를 앞세워 분위기부터 다르게 잡았습니다. 그래서 회사의 다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게임만 따로 아끼는 사람이 꾸준히 있습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이 시기 한국 오락실에서 탄막 슈팅은 이미 소수 취향이었습니다. 대형 오락실 구석에 한두 대 놓여 있고, 붙는 사람만 계속 붙어 있는 기계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 눈에는 화면이 온통 알록달록한 점으로 뒤덮여 보여서 도무지 사람이 할 만한 게임처럼 여겨지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그 앞에서 멀쩡히 살아 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동전을 넣고 몇 초 만에 죽어도 다음 판에는 조금 더 멀리 갑니다. 외운 만큼 정직하게 나아가는 게임이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눈에 확연히 보이고 그 차이를 좁히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 됩니다. 브라우저에서 바로 켤 수 있게 된 지금은 그 첫 한 판을 부담 없이 넣어 볼 수 있으니, 교복 입은 아이가 도시 위를 날아다니는 그 이상한 장면을 한 번쯤 직접 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