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듀로 레이서 오락실판
엔듀로 레이서 (Enduro Racer ym2151 fd1089b 317 0013a) · 1986 · S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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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크 모양 케이스에 올라타 몸을 좌우로 기울여야 하는 기체가 오락실 한구석에 놓여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엔듀로 레이서는 세가가 만든 대형 체감형 게임 가운데 하나로, 포장도로가 아니라 흙길과 바위밭을 달리는 오프로드 바이크를 다뤘습니다. 앞서 나온 로드 레이싱 계열이 매끈한 아스팔트 위의 속도를 다뤘다면, 이쪽은 튀어 오르고 착지하며 자세를 잡는 재미를 앞세웠습니다.
엔듀로 레이서(Enduro Racer)는 뒤에서 바이크를 바라보는 3인칭 시점의 레이싱입니다. 코스마다 정해진 제한 시간 안에 체크포인트를 통과해야 하고, 통과할 때마다 시간이 조금씩 더해집니다. 다른 주행 차량과 부딪히거나 장애물에 걸리면 바이크가 넘어져 시간을 크게 잃습니다. 결국 이 게임의 승부는 순위가 아니라 시계와의 싸움입니다.
점프가 만든 성격
이 게임을 다른 레이싱과 갈라놓는 것은 코스 곳곳에 놓인 흙 언덕입니다. 언덕을 밟으면 바이크가 공중으로 크게 떠오르는데, 이때 자세와 착지 위치가 다음 몇 초를 좌우합니다. 잘 뛰면 앞쪽의 장애물 구간을 통째로 건너뛰어 시간을 벌 수 있고, 어설프게 뛰면 착지하면서 균형을 잃고 넘어집니다. 공중에 떠 있는 동안에는 좌우 이동만 제한적으로 되므로, 뛰기 전에 착지 지점을 미리 정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실력은 브레이크를 얼마나 잘 참느냐로 갈립니다. 초보는 언덕을 무서워해 속도를 줄이고, 그 결과 충분히 뜨지 못해 언덕 사이의 좁은 구간에 애매하게 떨어집니다. 숙련자는 오히려 언덕 직전에 속도를 최대로 올려 길게 날아가 위험 구간을 통과합니다. 겁을 낼수록 손해라는 구조가 이 게임의 긴장감을 만듭니다.
코스에서 마주치는 것들
노면은 구간마다 성격이 바뀝니다. 넓게 트인 흙길에서는 마음껏 속도를 낼 수 있지만, 곧 길이 좁아지며 양옆에 바위와 나무가 붙습니다. 좁은 구간에서는 앞서 달리는 차량을 추월하는 것 자체가 위험해지므로, 추월할 자리를 미리 잡아 두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시야가 가려지는 언덕 너머로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나는 배치도 있어서, 코스를 외우는 만큼 기록이 줄어듭니다.
물웅덩이나 모래처럼 접지력이 떨어지는 노면에서는 조향이 무뎌지고 미끄러집니다. 이런 구간에서 급하게 방향을 꺾으면 그대로 넘어지므로, 미리 각도를 만들어 두고 부드럽게 지나가야 합니다. 넘어졌을 때의 손해가 워낙 커서, 위험을 무릅쓰고 추월하기보다 반 박자 기다렸다가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쪽이 결과적으로 더 빠른 경우가 많습니다.
몸으로 하는 조작
원래의 대형 기체는 실제 바이크 모형에 올라앉아 핸들을 잡고, 코너에서는 차체 전체를 기울여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팔로 방향을 바꾸는 것과 몸무게를 실어 기울이는 것은 감각이 전혀 달라서, 처음 타는 사람은 코너마다 어색하게 흔들리다 넘어지곤 했습니다. 대신 익숙해지면 화면 안의 바이크와 몸이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감각이 강렬해, 당시로서는 다른 어떤 레이싱보다 실감이 났습니다.
체감형 기체는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값이 비싸서, 국내에서는 손잡이만 있는 작은 형태로 놓인 곳이 훨씬 많았습니다. 앉는 형태로 개조된 기체나 일반 조이스틱 기판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접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조작 방식이 달라지면 난이도 체감도 달라져서, 같은 게임인데 어디서 했느냐에 따라 기억이 꽤 다릅니다.
세가 체감 계보 안에서
세가는 이 무렵 오토바이와 자동차, 전투기를 소재로 큰 기체를 연달아 내놓으며 오락실의 볼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스프라이트를 확대하고 축소해 속도감을 만드는 기술이 이 계보의 핵심이었고, 엔듀로 레이서도 그 기술 위에 서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매끈한 도로 대신 울퉁불퉁한 지형을 다루기 때문에, 화면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만들어 내는 리듬이 다른 작품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이 게임은 가정용 컴퓨터와 콘솔로도 여러 차례 옮겨졌는데, 기종에 따라서는 시점 자체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태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원작을 오락실에서 먼저 접한 사람은 그 이식판을 보고 당황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오락실 기체의 무게와 소리, 몸으로 기울이던 감각이 그대로 옮겨지기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오락실에서의 자리
국내 오락실에서 이 게임은 대개 큰 기체가 놓인 '비싼 자리'에 속했습니다. 한 판 값이 일반 기판보다 높은 경우가 많아 자주 하기는 어려웠고, 옆에서 남이 하는 걸 구경하다 차례를 기다리는 풍경이 흔했습니다. 흙먼지를 날리며 언덕을 뛰어넘는 화면은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난이도는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 체크포인트 간격이 빡빡해서 몇 번만 넘어져도 시간이 모자라고, 뒤로 갈수록 장애물 밀도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오래 붙잡고 늘어지기보다 코스 초반의 리듬을 익히는 데 여러 판을 쓰게 되는데, 그 반복 자체가 이 게임을 기억에 남게 만든 부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