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이 파이터 슈퍼패미컴판
클레이 파이터 (Clay Fighter Europe) · 1993 · Inter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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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격투 게임이 세상을 뒤덮던 시절, 대부분의 후발 주자는 더 멋진 무술가와 더 진지한 세계관을 내세웠습니다. 이 게임은 정반대로 갔습니다. 캐릭터를 전부 찰흙으로 빚어 한 컷씩 촬영한 뒤 화면에 옮겼고, 등장인물은 눈사람과 광대와 진흙 덩어리 괴물입니다. 진지한 대결 대신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과장된 효과음이 화면을 채웁니다. 격투 게임의 문법을 그대로 쓰면서 내용물만 통째로 바꿔놓은 셈입니다.
클레이 파이터(ClayFighter)는 찰흙 인형을 촬영해 만든 캐릭터들이 일대일로 겨루는 대전 격투 게임입니다. 두 사람이 체력이 다 닳을 때까지 치고받는 기본 구조는 여느 격투 게임과 같고, 방향 입력과 버튼 조합으로 필살기를 쓰는 방식도 같습니다. 다른 점은 오직 분위기입니다. 상대를 쓰러뜨렸을 때 나오는 연출까지 웃기려고 만들어져 있습니다.
찰흙으로 만든 화면
이 게임의 인상을 결정하는 것은 그래픽입니다. 실제로 만든 인형을 조금씩 움직여가며 사진으로 찍는 방식이라, 화면 속 캐릭터의 표면에 손자국 같은 질감이 남아 있습니다. 그림으로 그린 캐릭터에서는 나올 수 없는 부피감이 있고, 그래서 같은 슈퍼패미컴 게임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띕니다.
찰흙이라는 소재는 연출에도 쓰였습니다. 강한 공격을 맞으면 몸이 납작해지거나 늘어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이런 변형은 그림으로 그린 캐릭터라면 어색했겠지만, 찰흙이라는 설정 덕분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배경도 각 캐릭터의 성격에 맞춰 만들어져 있어서, 무대만 봐도 누구의 스테이지인지 알 수 있습니다. 화면 전체가 하나의 장난감 세계처럼 통일되어 있습니다.
싸우는 방식
조작은 당시 대전 격투의 표준을 따릅니다. 약공격과 강공격이 나뉘어 있고, 특정 방향 입력 뒤에 버튼을 누르면 필살기가 나갑니다. 커맨드 자체는 복잡하지 않은 편이라, 격투 게임을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도 몇 번 시도하면 필살기를 낼 수 있습니다.
캐릭터마다 성격이 뚜렷합니다. 몸집이 크고 느린 대신 한 방이 무거운 쪽, 가볍게 뛰어다니며 잔공격을 쌓는 쪽, 원거리에서 무언가를 던지는 쪽으로 나뉩니다. 자기 손에 맞는 캐릭터를 찾는 과정이 초반의 재미입니다.
다만 균형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특정 캐릭터의 특정 기술이 유난히 강해서, 둘이 붙을 때 그 기술만 반복해도 이기는 상황이 나옵니다. 진지한 대회용 게임이라기보다 함께 웃으며 하는 게임이라는 성격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알아두면 좋은 것
필살기가 잘 안 나온다면 대개 방향 입력이 너무 느슨해서입니다. 방향을 또박또박 거쳐 지나간 뒤 버튼을 누르면 성공률이 확 올라갑니다.
혼자 진행하는 모드에서는 후반 상대의 반응이 눈에 띄게 빨라집니다. 정면에서 계속 치고받으면 이기기 어려우니, 뛰어들어오는 순간을 노려 맞받아치거나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들어가는 흐름을 만드는 편이 낫습니다.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무리하게 필살기를 쓰기보다 확실한 평타로 조금씩 깎아나가는 쪽이 안전합니다. 필살기는 빗나갔을 때의 빈틈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격투 게임 사이에서
이 게임이 나온 시기에는 오락실에서 검증된 격투 게임들이 가정용으로 계속 이식되고 있었습니다. 그 틈에서 가정용 전용으로, 그것도 코미디를 앞세워 나온 격투 게임은 드물었습니다. 오락실 이식작들이 원작의 완성도를 얼마나 잘 살렸느냐로 평가받던 것과 달리, 이 게임은 비교 대상이 없다는 점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이후 시리즈가 이어지며 캐릭터가 늘고 연출이 더 과감해졌습니다. 이 첫 작품은 그 방향의 출발점에 해당하고, 나중 작품들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지만 발상 자체의 신선함은 여기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국내에서의 기억
국내에서는 격투 게임 하면 오락실의 유명작들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 게임은 상대적으로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대신 카트리지를 빌려 처음 켜본 사람들은 화면을 보고 한 번 웃고 시작했습니다. 진지하게 승부를 겨루기보다 이상하게 생긴 캐릭터를 골라 서로 놀리며 하는 쪽이었습니다.
격투 게임에 자신이 없던 사람도 부담 없이 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 이 게임의 미덕입니다. 커맨드를 외우고 콤보를 연습하는 문화 바깥에서, 그냥 재미있게 치고받는 격투 게임이 필요할 때가 있었고 이 게임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