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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썰 크래시 레이스

리썰 크래시 레이스 (Lethal Crash Race SET 1) · 1993 · Video System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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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싱 게임인데 상대가 딱 한 명입니다. 트랙 가득 늘어선 차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는 게 아니라, 지목당한 한 명과 나란히 출발해 먼저 결승선을 밟는 쪽이 이깁니다. 리썰 크래시 레이스는 90년대 초 오락실 레이싱이 한창 대형 체감형 기기로 몰려가던 시기에, 정반대로 단순하고 직접적인 싸움을 골라잡은 게임입니다.

리썰 크래시 레이스 레이싱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93)

한 명과 붙어 이기면 되는 레이스

리썰 크래시 레이스(Lethal Crash Race)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의 오락실 레이싱 게임입니다. 일본에서는 폭렬 크래시 레이스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세계 각지를 무대로 한 열 개의 스테이지가 준비되어 있고, 각 스테이지마다 한 명의 상대 드라이버와 맞붙습니다.

규칙은 명확합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표시된 길을 따라, 상대보다 먼저 결승선에 도착하면 됩니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거나 시간이 다 되면 거기서 끝입니다. 순위 다툼도 랩 계산도 없으니, 화면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직 저 차보다 내가 앞서 있느냐 하나뿐입니다.

시작 전에는 차를 고릅니다. 차마다 크기, 가속, 최고 속도, 접지 성능이 다르고 저마다 개성 있는 드라이버가 붙어 있습니다. 가속이 빠른 차는 코너를 자주 만나는 구간에서 유리하고, 최고 속도가 높은 차는 곧은 길이 긴 구간에서 격차를 벌립니다. 차체가 큰 차는 부딪힐 확률이 높지만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밀리지 않습니다.

리썰 크래시 레이스 레이싱 게임 화면 2 - 오락실 (1993)

코너와 부딪힘

위에서 내려다보는 레이싱의 핵심은 코너 진입입니다. 화면 시야가 진행 방향으로 넓게 열려 있지 않기 때문에, 굽은 길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최고 속도를 유지한 채 코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벽에 붙는 순간 속도가 죽고, 그 한 번의 실수로 상대와 거리가 크게 벌어집니다.

요령은 코너 앞에서 미리 안쪽 차선으로 붙어 두는 것입니다. 코너에 들어가서 각을 만들려 하지 말고, 들어가기 전에 이미 각이 만들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 습관 하나만 붙어도 기록이 눈에 띄게 좋아집니다.

상대 차와의 접촉도 변수입니다. 나란히 달리다 부딪히면 양쪽 다 진로가 흐트러지는데, 이걸 손해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코너 직전에 상대를 바깥쪽으로 밀어내면 상대가 벽을 타게 되고, 그 사이에 안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제목에 크래시가 들어간 게임인 만큼 이런 몸싸움이 허용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나면 게임이 훨씬 재미있어집니다.

어디서 어려워지는가

초반 스테이지는 길이 넓고 코너가 완만해서 차이가 잘 안 납니다. 문제는 중반 이후입니다. 길이 좁아지고 급한 코너가 연달아 나오면서, 한 번의 실수가 바로 패배로 이어지는 구간이 늘어납니다. 상대 드라이버의 주행도 점점 정교해져서, 앞서 나가도 방심하면 곧바로 따라잡힙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시간 관리입니다. 이 게임은 상대만 이기면 되는 게 아니라 제한 시간도 함께 걸려 있어서, 접전을 벌이느라 속도를 잃으면 둘 다 놓칠 수 있습니다. 상대를 밀어내겠다고 붙어 있는 것보다, 깔끔하게 앞서서 라인만 지키며 달리는 쪽이 안전한 순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비디오 시스템이라는 회사

만든 곳은 비디오 시스템입니다. 소닉 윙즈로 잘 알려진 슈팅 명가이자, 슈퍼 사이드킥스 같은 축구 게임으로도 이름을 남긴 회사입니다. 90년대 초반은 이 회사가 여러 장르를 활발하게 시도하던 시기였고, 이 레이싱 게임도 그 실험 중 하나였습니다.

이 시기 오락실 레이싱 시장은 이미 3차원 폴리곤과 대형 좌석 기기로 무게중심이 옮겨 가고 있었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도트 그림과 위에서 본 시점을 고수한 이 게임은 기술적으로는 뒤처져 보였지만, 대신 기판 값이 싸고 자리를 적게 차지하며 한 판이 짧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작은 오락실이 감당할 수 있는 레이싱 게임이었던 셈입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한국에서 이 게임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90년대 초중반 국내 오락실에서 레이싱이라 하면 대개 핸들이 달린 대형 기기를 떠올렸고, 조이스틱으로 하는 위에서 본 레이싱은 이미 한 세대 전 물건으로 취급받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게임들은 동네 작은 오락실이나 문방구 앞 기기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백 원으로 한 판이 짧게 끝나고, 옆 사람과 붙어서 승부를 낼 수 있다는 점이 그런 자리에는 잘 맞았습니다. 지금 다시 해 보면 조작이 단순한 만큼 몇 판 만에 감이 잡히고, 상대를 코너에서 밀어내며 앞서 나가는 순간의 쾌감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