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롬비 카
블롬비 카 (Blomby Car) · 1994 · ABM & Ge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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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오락실 레이싱 게임은 대개 운전석에 앉은 시점이었습니다. 화면 가득 도로가 밀려오고 핸들과 페달이 달린 커다란 기계에 앉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그런데 이 게임은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을 씁니다. 차 한 대가 작게 보이고 코스 전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좌석도 핸들도 없이 조이스틱 하나와 버튼 두 개로 하는 레이싱입니다.
블롬비 카(Blomby Car)는 시간 안에 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레이싱 게임입니다. 조이스틱으로 방향을 잡고, 한 버튼으로 가속하고 다른 버튼으로 제동합니다. 코스마다 제한 시간이 있고, 구간을 통과할 때마다 시간이 조금씩 더해집니다. 시간을 다 쓰면 그 자리에서 끝나므로, 사실상 시계와 겨루는 게임입니다.
이 시점의 운전
내려다보는 시점의 레이싱은 운전석 시점과 요구하는 감각이 다릅니다. 운전석 시점에서는 커브가 눈앞에 닥쳐서야 보이지만, 여기서는 앞쪽 도로가 어느 정도 보입니다. 대신 차가 미끄러지는 방향과 실제로 내가 조이스틱을 미는 방향이 어긋나는 순간이 많습니다. 위에서 보면 차가 옆으로 흘러가는 것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그 흐름을 읽고 미리 반대로 꺾어 주는 조작이 필요합니다.
커브나 위험 구간이 다가오면 도로 옆에 표지판이 나타나 미리 알려 줍니다. 이 표지를 보고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코스를 벗어나거나 벽에 박히고, 한 번 박히면 다시 속도를 붙이는 데 아까운 시간이 들어갑니다. 이 게임에서 가장 손해가 큰 실수가 충돌입니다.
요령
첫 번째는 브레이크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레이싱을 처음 하는 사람은 가속만 계속 누르고 있다가 커브마다 벽에 붙습니다. 커브 직전에 잠깐 제동을 걸어 속도를 줄이고, 차가 코스 안쪽을 향한 순간 다시 가속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계속 밟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빠릅니다.
두 번째는 코스를 외우는 것입니다. 시간과 겨루는 구조라 처음 달리는 코스에서는 어차피 좋은 기록이 안 나옵니다. 몇 번 달리면서 어디에 급커브가 있고 어디가 직선인지 익히고 나면, 표지판을 보고 반응하는 게 아니라 미리 준비한 채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코스 안쪽 선을 타는 것입니다. 커브에서 바깥쪽으로 크게 돌면 거리가 늘어나고 시간을 잃습니다. 안쪽으로 붙어 돌되 벽에 닿지 않을 만큼만 붙는 것이 요령인데, 이 거리 감각이 이 게임의 실력입니다.
이 게임이 나온 자리
이 게임은 이탈리아 회사가 만든 오락실 게임입니다. 1990년대 유럽에는 이런 소규모 오락실 게임 제작사가 여럿 있었고, 일본과 미국 회사들이 장악한 시장의 틈새에서 자기들 나름의 물건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큰 시장을 노리기보다 자기 나라와 인근 지역의 오락실에 공급하는 규모였습니다.
이 게임 역시 널리 보급된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기계를 통째로 파는 대신 기존 기계의 내용물만 바꿔 끼우는 형태로 나왔고, 생산량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 회사가 오락실에 내놓은 것은 사실상 이 한 편뿐입니다.
내려다보는 시점의 랠리 게임이라는 형식 자체는 이 무렵 스페인 회사가 만든 작품이 성공을 거두면서 유럽에서 유행하던 것이었습니다. 이 게임도 그 흐름 안에 있고, 그래서 형식 면에서 새로운 것을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대신 소규모 제작사가 유행하는 형식을 얼마나 잘 소화했는지를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유럽에서 만들어진 오락실 게임은 한국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국내 오락실 기판 유통은 일본 쪽 물량이 압도적이었고, 유럽 소규모 제작사의 게임은 유통 경로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을 한국 오락실에서 봤다는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런 게임을 해 보는 재미는 다른 데 있습니다. 같은 시기 일본과 미국 게임만 보다 보면 그 시절 오락실이라는 것이 하나의 세계였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유럽에도 남미에도 각자의 오락실 문화가 있었고 그 안에서 돌아가던 게임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 게임은 그 다른 쪽 이야기를 보여 주는 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