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닝 런
위닝 런 (Winning Run World 89 06 06 Ver 09) · 1988 · Nam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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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트가 아니라 면으로 그린 도로
이 게임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낯설었던 것은 도로가 도트로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오락실 레이싱 게임의 도로는 가로줄을 잔뜩 쌓아 올린 그림이었습니다. 차가 커브를 돌면 도로 그림이 통째로 좌우로 밀려나고, 길가의 나무와 간판은 크기만 커졌다 작아졌다 했습니다. 잘 만든 게임은 그 속임수가 아주 감쪽같아서 진짜로 달리는 것 같았지만, 어디까지나 잘 그린 그림이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게임의 화면은 그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도로가 한 덩어리의 면으로 되어 있고, 그 면이 시점에 따라 실제로 기울어지고 비틀립니다. 언덕을 넘어가면 도로의 반대편이 시야에서 뚝 사라졌다가 정상에 올라선 뒤에야 아래쪽부터 다시 올라옵니다. 커브를 돌 때는 바깥쪽 연석이 눈앞에서 회전하듯 지나갑니다. 색이 단순하고 면의 개수가 적어서 오히려 그 움직임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위닝 런(Winning Run)은 포뮬러 형태의 경주차를 몰고 서킷 한 바퀴를 정해진 시간 안에 통과하는 1인용 레이싱 게임입니다. 조작은 그 시절 오락실 레이싱의 기본형 그대로입니다. 핸들을 돌려 방향을 잡고, 액셀과 브레이크 페달로 속도를 조절하고, 기어 레버로 고단과 저단을 바꿉니다. 특별한 무기도, 경쟁자를 방해하는 장치도 없습니다. 코스를 얼마나 깔끔하게 통과하느냐만 따집니다.
한 판의 흐름도 단순합니다. 출발선에서 신호가 떨어지면 달리기 시작하고, 구간마다 놓인 체크포인트를 지날 때마다 남은 시간이 조금씩 더해집니다. 시간이 0이 되면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즉 이 게임에서 다투는 상대는 옆 차가 아니라 화면 위쪽의 시계입니다. 앞차를 추월하는 것도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진로를 막는 장애물을 치우는 일에 가깝습니다.
시간과 싸우는 방식
처음 잡으면 대개 첫 체크포인트도 못 넘고 끝납니다. 이유는 거의 항상 같습니다. 커브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면이 빠르게 흐르니 계속 액셀을 밟고 싶어지는데, 이 게임의 차는 관성이 제법 붙어 있어서 들어가는 속도가 조금만 높아도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밀려나서 코스를 벗어나면 속도가 확 떨어지고, 다시 최고 속도까지 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곧 손해가 됩니다.
그래서 요령은 의외로 보수적입니다. 커브가 보이면 진입 전에 미리 감속해 두고, 안쪽 연석을 스치듯이 붙여 통과한 다음, 코스가 펴지는 순간 액셀을 다시 밟습니다. 직선에서 아무리 잘 밟아도 커브 한 번 크게 미끄러지면 그 이득이 사라지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는 쪽이 늘 유리합니다. 기어도 마찬가지여서, 저단으로 내려 코너를 빠져나온 뒤 가속이 붙기 시작할 때 고단으로 올리는 리듬을 몸에 붙이면 기록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언덕과 내리막이 섞인 구간이 특히 까다롭습니다. 언덕 너머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커브가 시작되기 때문에, 코스를 외우지 않으면 매번 같은 자리에서 밀려납니다. 이 게임을 오래 붙잡는 사람들은 결국 코스를 통째로 외워서 화면을 보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기판과 그 시절 사정
이 게임은 3차원 도형을 그 자리에서 계산해 그리는 전용 기판 위에서 돌아갑니다. 당시 이런 연산은 오락실 기판이 감당하기에 상당히 무거운 작업이었고, 그래서 화면의 다른 부분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면에 무늬가 거의 없고 색도 몇 가지로 제한되어 있으며, 관중석이나 건물 같은 배경도 최소한만 놓여 있습니다. 요즘 눈으로 보면 휑해 보이지만, 그 휑한 화면이 실제로 기울고 돌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에는 볼거리였습니다.
남코는 이 방향을 계속 밀고 나가 이후 여러 3D 체감형 기기를 내놓았고, 이 게임은 그 계보의 출발점에 해당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회사들이 내놓은 레이싱 게임들은 여전히 확대 축소 방식의 화려한 그림으로 승부했기 때문에, 화면만 놓고 보면 이쪽이 오히려 초라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게임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오락실 레이싱이 그림을 흘려보내는 방식에서 공간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눈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해 볼 만한 이유
국내 오락실에서 이 기기를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큰 몸체를 통째로 들여와야 하는 체감형 기기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들어왔더라도 규모가 큰 곳에 한두 대 놓이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들어 봤지만 해 본 적은 없는 게임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해 보면 조작 감각은 분명 투박합니다. 차의 반응이 무겁고, 코스를 벗어났을 때의 처리도 요즘 기준으로는 거칩니다. 다만 몇 바퀴 돌다 보면 감속과 가속의 리듬이 손에 붙고, 그때부터는 기록을 몇 초 줄이는 재미가 생깁니다. 무엇보다 3D 레이싱이라는 것이 처음 어떤 모습으로 시작했는지를 확인하는 데는 이만한 게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