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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 크래시

하이퍼 크래시 (Hyper Crash Version D) · 1987 · Ko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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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싱 게임인데 결승선까지 남은 시간이 아니라 연료를 봅니다. 그리고 그 연료를 채우는 방법은 주유소에 들르는 것이 아니라, 앞에 가는 차를 들이받아 부수는 것입니다. 남의 차를 부술수록 내가 더 달릴 수 있다는 이 뒤집힌 규칙 하나 때문에, 이 게임은 같은 시기의 다른 운전 게임들과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되었습니다.

하이퍼 크래시(Hyper Crash)는 코나미가 만든 유사 3D 레이싱입니다. 차 뒤를 따라가는 시점으로 도로를 달리며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목표인데, 순위를 다투거나 제한 시간을 재는 대신 연료 게이지가 계속 줄어들고, 다른 차를 파괴해야만 그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여섯 개의 코스를 이어 달리며 세계 각지의 풍경을 지나갑니다.

하이퍼 크래시 레이싱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87)

부수면서 달린다

기본은 액셀과 조향입니다. 여기에 이 게임의 핵심인 공격이 붙습니다. 앞차를 그대로 들이받아 밀어붙이는 방법이 하나, 차체를 옆으로 던지듯 밀어 붙여 옆에 있는 차를 한꺼번에 쓸어 버리는 방법이 하나입니다. 부순 차마다 점수와 연료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운전은 보통 레이싱과 반대로 배웁니다. 다른 레이싱에서는 앞차를 피해 빈 차선을 찾아 달리는 것이 잘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차가 몰려 있는 쪽으로 일부러 파고들어야 합니다. 텅 빈 도로를 아무리 빠르게 달려 봐야 연료만 줄어들 뿐이고, 결국 목적지 앞에서 멈춥니다.

옆으로 미는 공격은 여러 대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어서 벌이가 좋지만, 그 동작 중에는 차선 조정이 어렵습니다. 앞에 장애물이 있는데 이 동작을 쓰면 그대로 박습니다. 차가 두세 대 나란히 붙어 있고 그 앞이 비어 있을 때가 쓰기 좋은 순간입니다.

도로 위의 장애물

코스에는 드럼통과 기름 같은 장애물이 놓여 있습니다. 부딪히면 속도가 죽고 그만큼 연료를 낭비하게 되므로 기본적으로는 피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의 재미있는 구석은, 그 장애물을 이쪽이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앞차를 드럼통 쪽으로 밀어붙이면 그 차가 대신 부딪혀 부서집니다. 직접 들이받는 것보다 안전하고, 잘하면 여러 대를 한 방향으로 몰아 한꺼번에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익숙해지면 장애물이 놓인 자리가 위험 구간이 아니라 벌이가 좋은 구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름은 조금 다릅니다. 밟으면 차가 미끄러져서 방향 제어가 잠깐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때 옆에 다른 차가 있으면 스스로 부딪혀서 손해를 봅니다. 기름이 보이면 일단 그 근처에서는 공격을 멈추고 차선을 정리한 뒤에 다시 붙는 편이 안전합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 자주 하는 실수

가장 흔한 것은 연료를 아끼려고 조심히 달리는 것입니다. 익숙한 레이싱 감각으로는 사고를 피하는 것이 곧 잘하는 것인데, 이 게임에서는 그렇게 하면 연료가 회복될 일이 없어 반드시 중간에 멈춥니다. 처음 몇 판은 무조건 차를 많이 부순다는 생각으로 달려야 규칙이 몸에 들어옵니다.

두 번째는 속도 조절입니다. 계속 최고 속도로 달리면 앞차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반응할 시간이 없습니다. 공격할 대상을 고르려면 어느 정도 여유가 필요하므로, 차가 몰려 있는 구간에 들어가기 전에는 속도를 조금 죽였다가 자리를 잡고 나서 다시 붙이는 편이 낫습니다.

세 번째는 코스를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사 3D 방식의 이 시절 레이싱은 화면에 보이는 거리가 짧아서, 커브나 장애물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는 코스 구성이 정해져 있으므로 몇 번 달려 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고, 그때부터 성적이 크게 달라집니다.

1987년의 코나미와 체감 기기

1980년대 중후반은 오락실 운전 게임이 한 단계 올라선 시기였습니다. 도로를 확대·축소하는 스프라이트 기술로 3D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식이 자리를 잡았고, 좌석이 달린 큰 캐비닛이 오락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마다 이 장르를 어떻게 차별화할지 고민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코나미가 내놓은 답 가운데 하나가 이 게임입니다. 다른 회사들이 더 빠르고 더 사실적인 주행을 향해 갈 때, 이쪽은 아예 파괴를 게임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운전 실력보다 상황 판단이 중요한 게임이 되었고, 그래서 지금 다시 해 봐도 낡았다는 느낌이 덜합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운전 게임은 늘 애매한 자리였습니다. 캐비닛이 크고 비싸서 아무 데나 놓을 수 없었고, 한 판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 회전율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문방구 앞보다는 규모 있는 오락실에 한두 대 놓이는 식이었고, 자리에 앉아 핸들을 잡는 것 자체가 조금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앉아 남의 차를 들이받는 게임이 걸려 있으면 확실히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 해 보면

한 판이 길지 않고 규칙도 단순해서 금방 감이 옵니다. 다만 익숙한 레이싱의 감각을 한 번 버려야 하는데, 그 전환이 이 게임의 첫 관문입니다. 피하는 게임이 아니라 부딪히는 게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도로가 위험한 곳이 아니라 연료가 굴러다니는 곳으로 보입니다.

여섯 코스를 이어 달리는 구성이라 뒤로 갈수록 차의 배치가 빡빡해지고 장애물도 늘어납니다. 앞 코스에서 연료를 얼마나 넉넉히 벌어 두었느냐가 뒤에서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초반부터 부지런히 부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결국 멀리 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