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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선백사

흑선백사 (Heuk Sun Baek Sa Korea) · 1997 · Ok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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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실에 격투 게임과 슈팅이 줄지어 선 사이에 바둑판 화면이 뜨는 기계가 한 대 있으면, 그 앞에 앉는 사람은 대개 정해져 있었습니다. 화려한 연출도 요란한 음악도 없이 격자와 돌만 놓인 화면인데, 한 번 앉으면 생각보다 오래 앉아 있게 됩니다. 흑선백사는 그런 자리를 차지하던 게임입니다.

흑선백사(Heuk Sun Baek Sa)는 옥산이 1997년에 내놓은 오목 게임입니다. 격자 위에 흑과 백이 번갈아 돌을 놓고, 가로세로 대각선 어느 방향으로든 다섯 개를 먼저 잇는 쪽이 이깁니다. 혼자 하면 컴퓨터를 상대하고, 둘이 붙으면 사람끼리 겨룹니다. 규칙 설명이 필요 없다는 점이 이 게임의 가장 큰 무기입니다.

흑선백사 보드·카드 게임 화면 1 - 오락실 (1997)

규칙은 한 줄, 내용은 깊습니다

오목의 규칙은 다섯을 먼저 잇는다는 한 줄로 끝납니다. 그런데 실제로 두어 보면 이 한 줄에서 나오는 수읽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세 개를 이어 두는 것은 상대에게 막으라고 요구하는 일이고, 네 개를 이어 두면 상대는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이 강제성을 이용해 상대의 응수를 묶어 두는 것이 오목의 기본입니다.

승부가 갈리는 지점은 대개 두 방향으로 동시에 위협을 만드는 순간입니다. 한 수로 세 줄과 세 줄, 혹은 네 줄과 세 줄이 동시에 생기면 상대는 한 곳밖에 막지 못합니다. 오목을 처음 두는 사람과 조금 둬 본 사람의 차이는 이 이중 위협을 만들 줄 아느냐에서 거의 갈립니다.

반대로 방어에서는 상대가 만들려는 이중 위협의 교차점을 먼저 차지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눈앞의 세 줄만 계속 막다 보면 어느 순간 막을 수 없는 자리가 생깁니다.

흑이 유리하다는 문제

오목은 먼저 두는 흑이 유리한 게임입니다. 한 수를 먼저 놓는다는 것만으로도 공격의 주도권이 흑에게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식 경기에서는 흑에게 제한을 거는 금수 규칙을 쓰기도 하고, 첫 몇 수의 위치를 정해 두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두면 판이 다르게 보입니다. 흑을 잡았다면 초반부터 주도권을 쥐고 몰아붙여야 하고, 백을 잡았다면 초반에는 버티며 흑의 공격이 끊기는 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백으로 두면서 초반부터 자기 모양을 만들려 하면 대개 그 사이에 당합니다.

컴퓨터와 사람, 두 가지 재미

혼자 할 때 상대는 컴퓨터입니다. 이런 시기의 아케이드 보드게임 인공지능은 대체로 눈앞의 위협에 반응하는 데는 강하지만, 여러 수 앞을 내다보는 데는 약한 편입니다. 그래서 정면으로 줄을 늘리려 하면 계속 막히고, 서로 떨어진 자리에 미리 돌을 흩어 두었다가 한 번에 연결하는 방식이 잘 통합니다.

둘이 붙으면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람은 실수를 하지만 함정도 놓습니다. 오목이 오락실 게임으로 성립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동전 하나로 붙어서 한 판이 짧게 끝나고, 진 사람이 바로 다시 붙고 싶어지는 구조입니다.

오락실의 보드게임 자리

1990년대 국내 오락실에는 바둑, 장기, 화투 같은 판을 화면에 옮긴 기계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몰리는 액션 게임과는 손님층이 달라서, 나이가 조금 있는 손님이나 액션 게임에 지친 사람이 잠깐 앉는 자리였습니다. 요란하지 않은 화면과 조용한 조작이 오히려 이 기계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옥산 같은 국내 업체들이 이런 게임을 만든 것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고사양 기판 없이도 완성도를 낼 수 있고, 규칙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설명이 필요 없으며, 한국 손님에게 특히 익숙한 소재였기 때문입니다. 개발 여건이 넉넉하지 않던 시기에 승산이 있는 영역이었습니다.

지금 해 보면

지금 다시 잡아 보면 이 게임이 왜 오래 앉게 만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판이 짧고, 진 이유가 명확하고, 다음 판에 그 실수를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사신경이 필요 없어서 오랜만에 잡아도 실력이 크게 녹슬지 않는다는 점도 이런 게임의 장점입니다.

화면은 소박하지만 승부는 소박하지 않습니다. 옆에 사람 하나만 있으면, 이 단순한 격자 위에서 꽤 오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