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7 에이스
P-47 에이스 (P 47 Aces Ver 1 1) · 1995 · Jal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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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팅 게임에서 적이나 지형에 부딪히면 죽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 게임은 그 상식을 뒤집었습니다. 적기나 지형에 몸을 부딪히면 죽는 대신 점수가 들어옵니다.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오직 적탄뿐입니다. 그러니 이 게임을 제대로 하려면 오히려 적에게 몸을 던져야 합니다. 슈팅 게임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손이 먼저 피하려 들어서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아주 고약하고 재미있는 규칙입니다.
P-47 에이스(P-47 Aces)는 1988년에 나온 P-47 더 팬텀 파이터의 후속작으로, 1995년에 자레코가 내놓은 가로 스크롤 슈팅입니다. 세계 각지를 무대로 여덟 개의 스테이지를 날아가고, 각 스테이지 끝에는 보스가 기다립니다. 프로펠러기를 소재로 삼은 슈팅이라는 점이 이 시리즈의 얼굴입니다.
네 대의 비행기, 네 갈래의 플레이
이번 작품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기체 선택입니다. 네 명의 조종사와 그들이 모는 네 대의 비행기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고, 각 기체는 무장이 다릅니다. 어떤 기체는 앞으로 곧게 뻗는 화력이 강하고, 어떤 기체는 넓게 퍼져 나가 잡몹 처리에 유리합니다.
이 선택이 실제 플레이를 바꿉니다. 곧게 뻗는 화력을 고르면 보스를 빠르게 녹일 수 있지만, 화면에 적이 흩어져 나오는 구간에서는 손이 바빠집니다. 넓게 퍼지는 무장은 반대로 잡몹 구간이 편하지만 보스전이 길어집니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정해져 있지 않고, 본인이 어느 구간에서 자주 죽는지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전작과 비교하면 기체 선택 자체가 없던 것에서 생긴 것이니 변화가 큽니다. 보스도 전작처럼 재활용되지 않고 스테이지마다 새로 나오며, 난도도 확실히 올라갔습니다. 후속작이 흔히 겪는 답습을 피하고 게임 엔진 전반을 손봤다는 점에서 성실하게 만들어진 속편입니다.
부딪혀도 되는 슈팅의 요령
몸통 충돌이 안전하다는 규칙은 그저 편의 장치가 아니라 이 게임의 공략 방향을 정합니다. 앞을 막고 있는 적기 무리가 있으면 굳이 피해 갈 것 없이 그대로 뚫고 지나가면 됩니다. 지형이 좁아지는 구간에서도 벽에 스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적탄입니다. 화면을 볼 때 적기의 몸통은 무시하고 총알만 좇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슈팅 게임을 해 본 사람일수록 큰 물체를 보면 반사적으로 몸을 빼기 때문입니다. 그 습관을 지우는 데 몇 판이 걸립니다.
점수를 노린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집니다. 충돌로 점수가 들어오니, 적진에 일부러 파고들어 부딪히며 지나가는 플레이가 성립합니다. 안전한 자리에서 멀찍이 쏘는 것보다 위험해 보이는 한복판이 오히려 이득인 구간이 생기는 것입니다. 점수를 겨루던 오락실 문화에서 이런 규칙은 상당히 매력적인 장치였습니다.
후반의 난도
여덟 스테이지가 진행되면서 난도는 꾸준히 올라갑니다. 올라가는 방식이 흥미로운데, 적의 수가 늘어나는 것보다 적탄의 각도와 밀도가 촘촘해지는 쪽입니다. 몸통 충돌이 안전한 게임이니 위협을 총알로만 만들어야 하고, 그러니 자연스레 총알 자체가 매서워집니다.
후반 보스전이 특히 그렇습니다. 덩치 큰 보스가 화면을 차지하고 여러 방향으로 탄을 뿌리기 시작하면, 피할 공간이 생각보다 좁습니다. 이때는 보스 몸통에 최대한 붙어 화력을 몰아넣는 편이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 몸통에 붙어 있으면 탄이 퍼지기 전이라 오히려 안전한 자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레코의 마지막 슈팅들
1995년의 자레코는 오락실 시장이 대전 격투와 3D로 급격히 기울던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2D 슈팅은 이미 전성기를 지나 있었고, 그런 시기에 프로펠러기 슈팅의 속편을 낸다는 것은 다소 뒤늦은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이 게임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데는 그런 시대 사정이 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자레코의 메가시스템 32 기판에서 돌아갑니다. 1990년대 초중반 자레코의 주력 기판이었고, 큼직한 스프라이트와 화면 효과를 여유 있게 쓸 수 있었습니다. 그 여유가 이 게임의 큼직한 보스와 스테이지 그림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국 오락실에서 이 게임을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995년이면 국내 오락실도 대전 격투가 자리를 거의 다 차지한 뒤였고, 새로 들어오는 2D 슈팅은 손님이 붙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도의 통칭도 붙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잡아 보면 몸통 충돌이라는 규칙 하나만으로도 다른 슈팅과 확실히 구분되는 게임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