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리
베스트리 (Bestri Korea) · 1998 · F2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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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에 여러 게임이 들어 있던 기계
1990년대 후반 동네 오락실에는 첫 화면부터 목록이 뜨는 기계가 종종 있었습니다. 동전을 넣으면 곧바로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게임의 이름이 늘어선 화면이 먼저 나오고 그중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한 대의 기계 안에 여러 게임이 들어 있는 이른바 합본 기판입니다.
이런 기계 앞에서는 고르는 시간부터가 놀이였습니다. 옆에 선 친구와 무엇을 할지 옥신각신하다가 동전 값을 낭비하기도 하고, 늘 하던 것만 고르는 사람과 매번 다른 것을 눌러 보는 사람으로 성격이 갈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게임인가
베스트리(Bestri)는 이런 방식의 국산 오락실 기판입니다. 한 기계에 여러 편이 담겨 있고, 시작 화면에서 하고 싶은 것을 골라 바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어서, 옆자리와 붙어 겨루거나 번갈아 하는 식으로도 즐겼습니다.
한 편 한 편의 규칙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기판에 들어가는 게임은 대개 한 판이 짧고 조작이 단순해서, 처음 앉은 사람도 설명 없이 몇 초 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만들어집니다. 길게 파고드는 대작보다는 짧게 여러 번 즐기는 쪽에 맞춰진 물건입니다.
합본 기판이 흔했던 이유
이런 형태가 많았던 데는 오락실을 운영하는 쪽의 사정이 있습니다. 기계 한 대가 차지하는 자리는 정해져 있는데, 한 대에 한 게임만 넣으면 그 게임이 인기가 없어지는 순간 자리 하나가 통째로 놉니다. 여러 편이 들어 있으면 손님의 취향이 갈려도 그 자리가 계속 돌아갑니다.
기계를 들이는 값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새 기판 한 대 값이 만만치 않던 시절에, 여러 편이 든 기판 하나로 자리를 채울 수 있다면 작은 오락실 입장에서는 셈이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이용자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같은 동전으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을 고를 수 있으니 질리는 속도가 느렸습니다. 특히 오락실이 작아 기계가 열 대 남짓인 동네에서는 이런 합본 한 대가 사실상 여러 대 몫을 했습니다.
국산 기판의 시절
1990년대 중후반은 국내 업체들이 직접 오락실 기판을 만들어 내놓던 시기입니다. 일본에서 들여온 기판이 대부분이던 오락실 풍경에 국산 게임이 하나둘 섞이기 시작했고, 화면에 한글 안내가 나오거나 한국어 음성이 들리는 기계가 늘었습니다.
규모가 큰 회사들이 아니었으므로 만들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대작 대신 짧고 명확한 게임, 혹은 이런 합본 형태가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대신 이런 기판들은 국내 오락실의 사정을 잘 알고 만들어진 물건이라, 동전 하나로 얼마나 즐길 수 있는지, 초보와 고수가 같이 앉아도 되는지 같은 부분이 잘 맞춰져 있었습니다.
1998년 무렵의 오락실
이 기판이 나온 시기는 국내 사정이 어려워 지갑이 얇아지던 때입니다. 오락실도 영향을 받아, 비싼 새 기계를 들이기보다 있는 자리를 알뜰하게 굴리는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여러 편이 든 기판이 늘어난 데는 이런 배경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대전격투와 리듬 게임이 큰 기계로 손님을 끌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화려한 기계 옆에서 이런 합본 기판은 조용히 구석 자리를 지켰습니다. 큰 게임을 하러 온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앉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이 시절의 국산 기판은 대부분 오락실 현장에서만 소비되고 사라졌습니다. 화려한 소개나 광고 없이 기계로 들어왔다가 오락실이 문을 닫으면 함께 없어졌기 때문에, 기억하는 사람도 그 동네에서 해 본 사람들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판을 다시 마주하면 게임 자체보다 그 시절 오락실의 공기가 먼저 떠오릅니다. 목록 화면 앞에서 무엇을 고를지 망설이던 몇 초, 옆자리에서 훈수를 두던 목소리, 동전 통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들입니다. 국산 기판이 오락실 한쪽을 채우던 짧은 시기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지금 해 보는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