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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ZERO X

F-ZERO X (F Zero x Europe) · 1998 · Ninte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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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대가 동시에 달리는 트랙

처음 F-ZERO X를 켜고 놀라는 건 화면 안에 들어찬 머신 수입니다. 앞선 시대의 레이싱 게임들이 서너 대를 겨우 그려 넣던 시절에, 이 게임은 서른 대를 한 트랙 위에 올려놓고 그것도 초당 60프레임으로 돌립니다. 스타트 신호가 떨어지면 눈앞이 머신으로 꽉 차고, 그 덩어리를 뚫고 앞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한 판의 첫 번째 과제가 됩니다.

대신 내준 것이 있습니다. 배경은 단색에 가깝게 비었고, 머신과 트랙은 텍스처가 거의 없는 민무늬 다각형입니다. 화려한 그래픽을 기대하고 켜면 심심해 보이는데, 몇 판 달려 보면 그 선택이 왜 옳았는지 몸으로 알게 됩니다. 시속 1000km를 넘겨 코너에 들어가는 순간, 눈이 좇을 수 있는 정보가 적다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F-ZERO X 레이싱 게임 화면 1 - 닌텐도 64 (1998)

어떤 게임인가

F-ZERO X(F-Zero X)는 반중력으로 떠서 달리는 미래형 머신으로 순위를 다투는 레이싱 게임입니다. 그랑프리 한 컵은 여러 코스로 이어지고, 코스마다 매긴 순위를 점수로 합산해 최종 성적을 냅니다. 30위로 들어와도 완주는 되지만 컵 우승은 못 하고, 그래서 매 코스에서 몇 등을 하느냐가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조작은 단순합니다. 가속과 브레이크, 좌우 조향, 그리고 어깨 버튼으로 기체를 좌우로 기울이는 사이드 어택이 있습니다. 여기에 부스트가 붙는데 이게 이 게임의 핵심입니다. 부스트는 두 번째 바퀴부터 쓸 수 있고, 연료가 아니라 기체 체력을 깎아서 씁니다. 즉 부스트를 쓸수록 죽기 쉬워집니다.

F-ZERO X 레이싱 게임 화면 2 - 닌텐도 64 (1998)

체력이 곧 연료다

체력 게이지 하나가 방어력과 속도를 동시에 맡는다는 설계가 이 게임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벽에 긁혀도 깎이고 다른 머신에 받혀도 깎이고, 부스트를 눌러도 깎입니다. 코스 곳곳에 있는 회복 구간을 지나면 조금 차오르는데, 그 회복 구간을 지나려고 라인을 억지로 틀다가 벽에 박아서 더 깎이는 일이 흔합니다.

그래서 한 판의 운영이 생깁니다. 앞바퀴에서는 체력을 아끼며 순위를 올려 두고, 회복 구간을 밟은 직후에 부스트를 몰아 쓰고, 마지막 바퀴에는 남은 체력을 전부 태워서 순위를 하나라도 더 끌어올립니다. 잘 달리는 사람의 주행을 보면 체력 게이지가 마지막 직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향해 내려갑니다.

사이드 어택도 그냥 심술이 아닙니다. 옆 머신을 밀어 코스 밖으로 떨어뜨리면 그만큼 앞자리가 비고, 반대로 얻어맞으면 내가 떨어집니다. 좁은 구간에서 옆에 붙는 순간 몸이 먼저 긴장하게 되는 게임입니다.

기체 고르는 재미

선택할 수 있는 머신이 서른 대나 되고, 최고 속도와 가속, 무게가 제각각입니다. 무거운 기체는 부딪혀도 잘 안 밀리지만 코너에서 라인이 크게 벌어지고, 가벼운 기체는 잘 돌지만 접촉 한 번에 튕겨 나갑니다. 게다가 출발 전에 가속 중시와 최고 속도 중시 사이에서 세팅을 옮길 수 있어서, 같은 기체라도 코스에 맞춰 성격을 바꿀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루기 무난한 중간 무게 기체로 코스를 외우고, 코스가 손에 익으면 자기 주행 습관에 맞는 기체를 찾아가는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코너가 많은 코스에서 무거운 기체를 잡으면 매 구간 벽에 긁혀 체력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막히는 곳과 넘기는 요령

처음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 곳은 원통형 코스나 파이프 구간, 그리고 트랙이 끊겨 있는 점프 구간입니다. 화면이 통째로 돌아가니까 좌우 감각이 헷갈리고, 조향을 한 박자 늦게 넣다가 그대로 밖으로 나갑니다. 이런 구간은 화면 위쪽 미니맵을 흘끗 보며 다음 코너 방향을 미리 알아 두는 게 훨씬 낫습니다.

또 하나는 부스트를 아까워하다 못 쓰는 경우입니다. 체력을 가득 남긴 채 10위로 완주하는 것보다 체력을 다 쓰고 3위로 들어오는 편이 컵 성적에는 좋습니다. 마지막 바퀴에서는 미련 없이 태워도 됩니다.

난이도를 한 단계 올리면 상대 기체들이 부딪혀 오는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납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무리해서 안쪽 라인을 파고들기보다, 무리 바깥으로 돌아 나가며 접촉을 피하는 편이 순위가 더 잘 나옵니다.

시리즈 안에서의 자리

앞선 작품이 두 대의 머신을 확대 축소로 그려 속도감을 만들었다면, 이 작품은 3D 다각형으로 코스 자체를 뒤집고 꼬아 놓는 쪽으로 갔습니다. 루프를 돌고 원통 안쪽을 달리는 코스는 앞선 방식으로는 만들 수 없던 것입니다. 이후 시리즈가 화려한 그래픽으로 옮겨 간 뒤에도, 프레임을 지키기 위해 그림을 덜어낸 이 작품의 주행 감각을 최고로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내에서는 닌텐도 64 자체가 널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게임기를 갖춰 놓은 대여점이나 게임방에서 이 게임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면이 휑해서 무심코 지나쳤다가, 한 판 잡아 보고 속도에 놀라 계속 붙잡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유독 많은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