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거 T. 록
디거 T. 록 (Digger T Rock the Legend of the Lost City Europe) · 1990 · R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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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으면 파면 됩니다
대부분의 액션 게임에서 지형은 정해진 무대입니다. 발판이 놓인 자리로만 갈 수 있고 벽은 벽입니다. 이 게임은 그 전제를 뒤집습니다. 눈앞의 흙벽은 삽으로 파낼 수 있고, 파낸 자리는 그대로 길이 됩니다. 어디로 갈지 스스로 정하는 대신, 잘못 파면 스스로 무덤을 만드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디거 T. 록(Digger T. Rock: The Legend of the Lost City)은 지하 깊은 곳에 잠든 도시를 찾아 내려가는 액션 게임입니다. 화면은 옆에서 본 단면이고, 주인공은 흙을 파고 층을 만들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갑니다. 각 구간의 목표는 출구를 찾아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바위가 무섭습니다
이 게임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바위입니다. 흙 사이사이에 박힌 큰 돌은 아래를 파내면 그대로 떨어지고, 그 아래에 주인공이 있으면 끝입니다. 무심코 발밑을 파다가 위에 있던 바위가 따라 내려와 깔리는 죽음이 가장 흔합니다.
그래서 파기 전에 위를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바로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지, 옆으로 한 칸 비켜서 파면 어떻게 되는지 계산하는 것이 이 게임의 실력입니다. 반대로 바위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아래에 적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바위를 떨어뜨리면 위험 요소를 미리 치울 수 있습니다.
폭약도 같은 논리로 씁니다. 파낼 수 없는 단단한 지형은 터뜨려 뚫어야 하는데, 불이 붙어 있는 동안 자기가 그 자리를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급하게 놓고 우물쭈물하다가 같이 날아가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게이지를 보며 움직이기
아래로 내려갈수록 화면은 어두워지고, 남은 여력을 나타내는 표시가 조금씩 줄어듭니다. 지상에서처럼 여유롭게 탐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을 되돌아 나오면 그 자체로 손해가 됩니다.
중간에 놓인 보급품과 보물을 챙기면 여유가 생기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 주우려다 시간과 체력을 다 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처음 몇 번은 욕심 없이 출구만 보고 내려가면서 지형의 규칙을 익히는 편이 빠릅니다.
발밑을 파서 떨어질 때는 낙하 거리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너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그것만으로 위험하고, 착지 지점에 함정이 있으면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레어가 만들던 패미컴 게임들
이 작품을 만든 곳은 훗날 여러 대표작으로 이름을 알리는 영국 개발사입니다. 이 시기 이 회사는 북미 시장을 겨냥해 패미컴용 게임을 상당히 많이 찍어 냈고, 레이싱과 액션을 오가며 실험적인 물건을 자주 내놨습니다.
그 결과물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화면이 깔끔하고 조작 반응이 좋은 대신 난이도가 사정없이 높습니다. 디거 T. 록도 예외가 아니어서, 규칙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몇 걸음 못 가 죽고 이해한 뒤에도 한순간의 실수로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됩니다.
땅을 파는 액션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위에서 내려다본 화면에서 통로를 뚫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옆에서 본 화면에 중력과 낙하를 함께 얹어, 파는 행위 자체를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결이 다릅니다.
국내에서는 어떻게 만났나
이런 게임은 국내에서 정식으로 소개되기보다 여러 게임이 함께 들어 있는 카트리지 안에서 우연히 만나는 쪽이었습니다. 목록을 훑다가 처음 보는 제목을 골랐는데 땅을 파는 게임이 나오면, 규칙을 알려 줄 사람도 설명서도 없이 죽어 가며 배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배움의 과정이 이 게임의 재미이기도 합니다. 바위가 왜 떨어지는지, 폭약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어디까지 떨어져도 되는지를 몸으로 알아 가는 순간부터 화면이 달라 보입니다. 요령을 익히고 나면 무작정 어렵기만 한 게임이 아니라 매번 다른 길을 뚫어 보는 게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