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맨 제로
록맨 제로 (Rockman Zero J Eurasia) · 2002 · C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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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깨어난 제로
첫 장면부터 이 게임은 보통 록맨이 아니라고 못을 박습니다. 폐허가 된 연구소, 추격당하는 소녀, 그리고 봉인된 캡슐 안에서 잠들어 있던 붉은 기체. 시엘이라는 소녀가 캡슐을 깨우는 순간 제로가 눈을 뜨는데, 기억이 없습니다.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1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눈앞의 적부터 베어 넘겨야 합니다.
록맨 제로(Rockman Zero)는 게임보이 어드밴스로 나온 횡스크롤 액션 게임입니다. 록맨 X 시리즈에서 조연이었던 제로가 주인공 자리를 물려받았고, 배경도 X 시리즈로부터 한참 뒤의 시대로 옮겨갔습니다. 인간이 레플리로이드를 사냥하는 세상이 되어 있고, 제로는 쫓기는 쪽에 서서 레지스탕스와 함께 싸웁니다.
버스터가 아니라 검
역대 록맨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주무기가 총이 아니라 검이라는 것입니다. 제로 세이버는 사거리가 짧은 대신 위력이 크고, 휘두르는 동안 제로의 몸이 앞으로 따라 나갑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전투는 멀리서 쏘아 맞히는 싸움이 아니라 적의 공격 사이로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오는 싸움이 됩니다.
무기는 세이버, 버스터 샷, 트리플 로드, 체인 로드 넷이고 저마다 따로 레벨이 오릅니다. 많이 쓸수록 숙련도가 쌓여 새로운 기술이 열리는 구조라, 편한 무기만 쓰면 나머지가 영영 초보 상태로 남습니다. 체인 로드는 갈고리처럼 던져 멀리 있는 발판에 매달릴 수 있어서 전투보다 이동에 쓰는 일이 많습니다.
사이버 엘프와 랭크
사이버 엘프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말이 많았던 장치입니다. 스테이지에서 주운 엘프에게 에너지 크리스탈을 먹여 키우면 체력 증가나 즉사 방지 같은 능력을 주는데, 문제는 엘프를 쓰는 순간 그 엘프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아껴 두자니 어렵고 쓰자니 아깝습니다.
게다가 임무를 마칠 때마다 등급이 매겨집니다. 시간, 피격 횟수, 적 처치 수를 따져 S부터 순서대로 붙는데, 여기서 엘프를 쓴 만큼 점수가 깎입니다. 편하게 가면 등급이 떨어지고 등급이 떨어지면 보스의 EX 스킬을 못 받습니다. 초심자에게는 가혹한 설계였고, 실제로 다음 작품부터 조금씩 완화됩니다.
미션과 반복 출격
스테이지 구성도 기존 록맨과 다릅니다. 여덟 보스를 골라 깨는 방식이 아니라, 레지스탕스 기지에서 임무를 받아 나갔다가 돌아오는 식입니다. 같은 지역을 목적만 바꿔 다시 가기도 하고, 여러 임무가 동시에 열려 어느 쪽을 먼저 갈지 고르게 되기도 합니다.
기지에는 시엘 말고도 동료들이 있어서 출격 전에 말을 걸면 상황이 조금씩 다르게 나옵니다. 세계관 설명을 대사로 풀어 놓는 편이라, 액션만 보고 지나치면 이야기의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어려웠고, 그래서 남았다
1편은 시리즈 네 작품 가운데 가장 불친절하다는 평을 오래 들었습니다. 세이브 지점이 인색하고, 처음 보는 함정에 그대로 당하고, 등급 시스템이 실수를 끝까지 기억합니다. 손이 익기 전까지는 한 임무를 몇 번씩 다시 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시리즈가 오래 회자되는 건 손맛 때문입니다. 세이버 한 번에 잡몹이 두 동강 나는 감각, 대시로 파고들어 베고 다시 빠지는 흐름이 휴대용 기기에서 이만큼 매끄럽게 굴러갔다는 게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다듬어지지만, 이 1편의 뻣뻣하고 각진 맛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